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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Dec 11. 2017

고독한 시인의, 파리의 우울

라이너 마리아 릴케,『말테의 수기』

파리의 우울


릴케를 처음 만난 것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을 때였다. 릴케는 시인 지망생 카푸스에게 진심 어린 조언과 위로를 보냈는데, 그렇게 열 개의 편지가 모여 출간되었다. 그때 나는 시에게 또 사랑하는 이에게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답장 대신 받은 릴케의 편지가 그렇게 좋았다. 막연한 기다림을 릴케 덕분에 버텨냈던 것도 같다.  

  

<말테의 수기>는 프라하와 파리에 다녀와서 읽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릴케가 파리에 머물면서 쓴 자전적 소설이었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골목과 다리 밑을 들여다보며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을 썼다면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썼다. 좁은 거리의 곳곳에서 “요오드포름 냄새, 감자튀김의 기름 냄새, 불안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마치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것들의 이면의 진실을 들추어내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해주려는 듯이. 릴케는 소설의 첫 문장에 이렇게 적는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잿빛 도시에서는 죽음조차도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듯이 찍어지고 있었다. 튤리에 가의 디외 병원은 죽으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아무도 자기만의 죽음을 죽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서도 자기만의 생을 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잘 마무리된 죽음을 위해 돈을 치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도 없다. 빈틈없는 절차를 밟아 죽을 수 있을 만큼 돈을 가진 부자들조차도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진다. 좀 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다. 맙소사. 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 그저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 그저 그것을 기성복처럼 입기만 하면 된다.    



고독의 시인


말테 그러니까 릴케는 고독, 불안, 외로움, 그리움과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러나 내버려두면 영혼을 갉아먹을 수 있는 감정들을 끌어안은 채 오직 시를 썼다. 평생을 그런 섬세한 마음의 움직임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인 것 같으면서도 그럼에도 그것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예술밖에 없는 듯하다. “자신도 처음엔 확대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이 미세한 현상을 정말 혼자서 바로 확대시켜 수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 앞에 거대하게 나타내 보이려” 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만의 생을 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확신 없는 인생이지만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 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 밤새도록 앉아서 글을 썼던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불만족하고 자신에 대해 더욱더 불만족하며 지금 이 밤, 고독과 정막 속에서 나는 스스로 기력을 되찾고 자신을 조금 사랑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내가 찬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나를 굳세게 해다오. 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해다오. 내가 이 세상의 허위와 부패로부터 멀리 있게 해다오. 당신, 나의 주인이신 신이시여, 제게 은총을 내려주시어 몇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쓰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못난 자, 멸시에 마지않는 자들보다도 더 못난 인간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게 해주소서. (보들레르의 산문시『파리의 우울』속의 「새벽1시」의 끝 구절)     
창밖에는 언제나 똑같이 무관심한 밤이 계속되고 있고, 또한 나의 고독 외에는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초한 고독,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고독이 밖에도 있었다. 문득 옛날에 헤어졌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왜 그 사람들과 헤어지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신이여. 그러한 밤들이 내게 다가오면, 내가 때때로 생각할 수 있었던 생각들 중에 최소한 한 가지라도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럴 때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런 생각은 내 공포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런 데에서 공포가 생겨난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운 시절


말테는 낯선 도시에서 홀로 지내면서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어렸을 때 동생의 죽음을 겪고부터 우울증을 앓았지만 말테에게만큼은 섬세하고 다정했던 어머니와의 한때. 릴케는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인생에는 초보자를 위한 학급은 없고, 언제나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할 지극히 힘든 일이 있을 뿐이란다”라며 릴케가 나에게 그랬듯이, 말테를 다독여주었다.     


그러나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어머니는 오셔서 30분간 동화를 읽어주셨는데, 동화 때문에 오시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동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놀라운 일에 대해서는 남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들이 될 때 그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공중을 날아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요정들에 대해서는 실망하였고,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가벼운 즐거움 정도로 느꼈다. … 그러나 방해받지 않는다고 확신이 서고, 바깥이 어둑해지면 어머니와 나는 지난 추억들을 얘기했다. 우리 둘에게 먼 옛일 같은, 함께 겪은 추억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둘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커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귀한 사랑


그러던 말테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아벨로네라는 처녀에게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을 배운다. 그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랑을 완전하지 않다고 보고, 사랑을 주기 위해 주는 사랑을 하는 아벨로네를 칭송한다. 그는 “우리 자신의 배역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거울을 찾아 분장을 지워버리고 잘못된 가면을 벗고 진실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경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불행해져 집을 떠난 탕자가 자신에게만 향한 것이 아닌, 더 고차원적이고 사랑을 깨닫고 돌아온 이야기라 적는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얻은 성과들을 경멸한다면 어떨까? 우리들을 위해서 언제나 남이 해준 사랑의 일을 아주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많은 것이 변해 가는 지금 우리가 자진해서 초보자가 되면 어떨까?     
운명은 여러 무늬와 형상을 고안해 내기를 좋아한다. 그 어려움은 복잡한 데에 있다. 하지만 인생 그 자체는 단순함으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생명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크기를 지닌 몇 가지밖에 우리에게서 얻지 못한다. 성자는 운명을 거부하면서 신을 대하며 이 위대한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여자는 본래부터 남자와의 관계에서 이와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애정 관계는 불행을 초래한다. 여자는 항상 변모되어 가는 남자 곁에서 운명도 모르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서 있다. 삶은 운명보다 더 위대하기에 사랑하는 여자는 언제나 사랑받는 남자보다 우월하다.     
놀라울 정도로 연로하지만 닮은 얼굴들, 성인이 모습들이 창가에 나타난다. 그 중 온전히 늙어버린 한 얼굴을 갑자기 인식이 창백하게 뚫고 지나간다. 인식이라고? 정말로 그것뿐이었을까?…… 용서다. 무엇에 대한 용서일까? 아니, 그것은 사랑이다. 아, 그것은 사랑이다.
그는, 지금 인식된 자 그는 너무 정신이 팔려 있어서 미처 그 생각을 못했었다. 사랑이 아직도 있을 수 있음을, 그 후 일어난 모든 일 중에서 오직 이것만이 전해져 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의 몸짓,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몸짓, 그는 모든 사람의 발밑에 엎드려서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를 간청하는 몸짓을 했다. 그들은 놀라서 주저하면서도 그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그 기괴한 행동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를 용서해 주었다. 분명히 절망을 나타내는 행동인데도 모두가 그를 오해한 것이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는 집에 머무르고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드러내며 서로 몰래 격려하면서 보여준 사랑이 그를 염두에 둔 사랑이 아님을 그는 갈수록 더 많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살아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서 그는 거의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그에 대한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사랑이다. 세계를 향한, 나의 내면을 향한, 당신을 향한 사랑. 답장을 보내지 않을지라도,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을지라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기다리는 일밖에 없다면 나는 기다릴 것이다. 주고받는 사랑보다 더 존귀한 사랑을 할 것이다. 사랑의 끝에서 한탄할지라도 나의 “포옹을 헛되이 만든 사람을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을 한탄”할 것이다. 내가 기약도 정해 주지 않고서 아스라이 멀리 있는 당신을 기다리는 방법은 오직 시를 쓰는 일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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