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모던걸 백년사> 후기
스스로를 '쎈언니' 타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어딘지 불편하게 느껴졌던 대학교 3학년 5월. 강남역에서 '남자를 보내고 여자를 기다리다가' 살인한 이가 나왔고, 그는 자신의 입으로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해서' 죽였다고 시인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분노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주저 없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게됐다.
그리고 학보사 2년, 또 세계여행 1년 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페미니즘이었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기사로, 개인적인 기고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우리'의 힘으로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바뀌어 나갔고, 나는 페미니즘보단 당장의 내 생계가 급급한 직장인이 됐다.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페미니즘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게 되니 이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페미니즘은, 또 '나'의 페미니즘은 어떤 길을 거쳐왔으며 현재 어디에 있나. 연극 [모던걸 백년사]는 여러가지 의미로 그 역사를 되짚어보게 했다.
모든 시대의 '요즘 여자'들에게
모던걸 백년사는 1920년대를 살아가는 '모던걸' 경희와 2020년대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 화영의 이야기를 다룬다. 외국 유학까지 가 신식교육을 받아, '주제도 모르고' '감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이혼까지 하는 경희. 국어국문과 학생으로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는 부모님의 강요에 못 이겨 교직이수를 하고 있는 화영. 언뜻 둘의 삶은 상반돼 보이지만 둘에겐 공통점이 있다. '여성'이란 프레이밍의 피해자라는 것. 나경희는 다른 여자들처럼 스스로를 죽이고 살지 않고 자주적이라는 이유로 '요즘 여자들'의 표본이 되어 비난 받는다. 화영은 자주적이고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즘 여자'들과 다르다며 남자 선배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자주적이기에 힐난의 대상이던 1920년대의 '요즘 여자'와, 남성 의존적이기에 힐난의 대상인 2020년대의 '요즘 여자'. 사실 그들에게 '요즘 여자'의 속성이 어떤가는 큰 상관이 없다. 단지 그들이 바라는 여성 상이 있고, 그에 맞지 않는 이들을 다 '요즘 여자'로 뭉뚱그려 비난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렇게나 허술한 '요즘 여자' 논리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영광을 이어받은 - 덕분에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연대의 동의로 사회적 통념이 된다.
이 '요즘 여자' 논리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경희처럼 비난을 받았든, 화영처럼 칭찬을 받았든 단지 사회의 프레이밍에 재단 당했을 뿐이다. 온전히 다른 삶을 사는 두 여성은, 남성의 시선 아래, 사회의 시선 아래 종종 같은 운명을 걷는다. 뮤지컬은 같은 시선, 프레이밍에 재단 당하고 힘겨워하는 경희와 화영을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그 사회적 통념들의 논리가 얼마나 얕고 어리석은지,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뿌리 깊게 박혀 여성들을 핍박해왔는지 보여준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위한 ‘페미니즘’ 뮤지컬이 되기 위해
다만, 작품의 목적성과 메시지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일까. 어느 부분에서는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선, 화영이 ‘교직 이수’를 부모님의 강제로 여기고, 이수 수료 자체를 큰 짐덩어리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화영이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다지만, 아니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다면 더더욱 ‘여성’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교직이수는 국문과 학생이 들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커리어 보험이다. 화영이 경영학과이며, 스타트업 대표를 꿈꾸는 이였다면 교직이수를 하라는 부모님의 압력이 더더욱 강요로 느껴졌을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수입이 적고, 일정치 않은 작가를 꿈꾸는 화영에게 교직이수가 그만큼이나 부담이고 강제적으로 느껴진다는 설정은 오히려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하고자 대학 때부터 ‘취준’에 고민이 많은 최근 20대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진이 그 좋은 성적, 대외활동 등의 스펙에도 불구하고 2년제 비정규직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리천장은 존재하고, 같은 스펙이라면 여성보단 남성이 훨씬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선배는 훨씬 낮은 성적으로도 쉽게 대기업 인턴에 붙고, 과탑이었던 나진은 2년제 비정규직이라는 설정은 극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끼워맞춘 듯 해 오히려 몰입을 방해했다.
더불어, 접근 전략의 아쉬움도 있었다. 페미니즘 뮤지컬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라 생각한다.
1) 기존에 대중적이지 않던/혹은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 및 시각 제시
2)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를 설득
3) 기존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을 지속해야 할 이유 제공
<모던걸 백년사>에서 2020년대의 모습으로 나오는 사례들은 담론이 막 시작되었던 2010년대 후반쯤 ‘불편하다고 느낀 이유가 내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는 공감대를 기반으로 공론화 됐던 부분이다. 때문에 <모던걸 백년사>가 의도하는 작품의 의미는 1번보단 2번&3번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던걸 백년사>가 남성들을 묘사한 방식에 아쉬움이 남는다. 모던걸 백년사 속 남성들은 멍청하게 여성혐오만을 일삼는 한심하고 악랄한 안타고니스트로 그려진다. 과도하게 편향적인 묘사는 공감보단 반감만을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페미니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아직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불쾌감이 더 클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 담론에서 항상 나오는 얘기로 ‘피해자가 대체 왜 가해자를 달래 가며 주장해야 하나’는 말에는 공감하는 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필요가 있다.
<82년생 김지영>에서도 남편 역으로 공유를 내세우고, 소설보다 훨씬 더 남편의 노력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부조리함을 남성의 탓으로 돌리기 보단 ‘사회’의 탓으로 돌려 대중성을 확보하고, 더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남성도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선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반으로 호소하는 것. 물론, 무척이나 온건한 방법이지만 <모던걸 백년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급진적이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차라리 조금 더 온건한 스탠스로 더욱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백년의 시간이 주는 의미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던걸 백년사는 192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100년간 페미니스트들이 이어온 족적들과, 수많은 노력이 쌓여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 만으로도 무척이나 의미 있었다. 극 초반에 가정폭력 관련 법 개정 - 호주제 폐지 - 낙태죄 폐지 등을 위해 싸워온 수많은 운동가들의 모습은 내가 지금 딛고 서 있는 이 자리가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줬다.
앞서 화영의 모습이 2010년대 후반 모습 같아서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이거 나만 불편하냐'며 스스로의 불편한 감정마저 검열했던 내가 이제는 '그래도 이제는 남성들의 저런 행동이 불쾌할만하고, 나쁜 행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회는 변하고 있고, 우리는 이전 페미니스트들이 쌓아놓은 반석 위에서 살아간다- 이 깨달음은, 생계 걱정에 시달리며 이전보단 페미니즘과 멀어졌던 내가 다시금 다음 세대를 위해 내가 뭘 남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줬다.
100년의 시간의 간극을 두고서도 비슷한 일을 겪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의 시간을 넘어 연대하며 나아가는 경희와 화영의 모습은 그 100년의 연대에 나 또한 손을 보태고 싶게 만들어줬다. 경희와 화영이 마지막에 불렀던 곡에선 나 또한 서로 마주하고 웃을 수 있는 ‘언젠가’를 꿈꾸게 하기도 했다.
다만 그런 만큼, 그 ‘언젠가’가 더 빨리 도래할 수 있도록, 아쉬운 점들을 기반으로 더욱 발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던걸 백년사>를 관람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