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에게 신이 정말 ‘전지’전능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죄를 뉘우치기 위해서 기도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죄를 뉘우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신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행동까지 하기 이전에 용서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마음을 품는 순간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냐고.
“드미트리가 주인님을 찾아갈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왜 모두가 집을 비웠던 걸까요?”
위의 전제를 깔고보면 스메르쟈코프의 이 물음이 무척이나 섬뜩하다. 드미트리가 표트르를 죽이러 올 것이 분명했던 그 상황에서, 심지어 스메르쟈코프도 발작으로 표트르 곁을 지키지 못할 것임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반과 알료샤가 집을 비운 것은 암묵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의지’로서 보자면 표트르의 죽음에 협력했다고 말하더라도, 아니 그들조차도 살인자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누가 행동을 했을까 그건 중요한 게 아냐 누가 더 원했을까 그게 중요한 것. 형제들 중 가장 그의 죽음을 원하는 자 누굴까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누굴까.”
만약 스메르자코프가 표트르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날 밤 드미트리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세 형제 모두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했으며, 그걸 읽었기에 스메르쟈코프는 그 악의와 의지들을 ‘행동’으로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메르쟈코프는 표트르를 죽인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모두의 바람을 자신이 행동으로 옮긴 것 뿐이니,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 모두의 바람을 현실로 만든 행동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극은 '의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단순히 '행동'하지 않았다고 자신은 도덕적이라 생각하고 앉아있는 당신들은, 정말로 단 한번도. 그러한 '의지'를 가져본 적도 없냐고. 가져본 적이 있다면 지금도 당신을 도덕적이라 평할 수 있겠냐고.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계속해서 ‘신’과 ‘악마’에 대해서 말한다. 구원자를 죽이려고 하는 대심문관 이야기라던가, 아이의 어머니 앞에서 개가 아이를 갈기갈기 찢게 한 장군의 이야기 등. 신과 악마,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끝없이 토론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대심문관 서사시였다.
어느날 구원자가 내려왔다. 자신이 구원자라 주장하는 그를 대심문관은 잡아서 지하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어느 날 대심문관은 그를 찾아간다.
“아무 말도 하지마라. 나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의 존재를 내세우며 우리의 존재를 번성시켰다. 이제 와서 당신이 존재하면 우리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러니 사라져라. 불길 속에 사라져라!”
이 대화는 ‘신’과 ‘종교’의 관계를 고민케 한다. 신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고, 신을 증거하는 것이 종교밖에 없기에 사람들은 종교에 매달린다. 만약 이 땅에 신과 구원자가 존재한다면 더 이상 종교의 의미는 사라진다. 신과 구원자의 존재를 근거로 종교가 존재할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신과 구원자가 존재한다면 종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그리스도과 악마와 한 담화를 대신문관이 정면으로 반박하는 장면에서 더욱 깊이를 더해간다.
“이 돌을 빵으로 바꾸면 너를 인정하겠다. 여기에서 떨어져 무사하다면 너를 경배하겠다.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모든 이들이 너에게 복종하게 하겠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믿음엔 증거가 필요 없고 믿음은 기적에서 나오지 않으며, 복종은 강요가 아닌 자유에서 나온다.”
악마의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에 대심문관은 코웃음을 친다. 그리고 답한다.
“네가 빵을 주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 빵을 얻기 위해 노예처럼 일을 한다. 니가 믿음을 주었기에 사람들은 너를 믿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네가 자유를 주었기에 사람들은 널 거역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네가 저기 하늘에 있는 동안 세 가지 물음에 답하지 않았기에 세상엔 노예와 겁쟁이와 반역자가 생겨났다. 네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에 우린 널 불 태울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
극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에서 대심문관은 우리 즉 ‘인간’은 그렇기에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말한다. 신과 예수는 인간을 선하고 고결한 존재로 보았기에 당장 눈앞의 빵보다는 자유를, 기적으로 말미암은 믿음보단 믿음으로 말미암은 기적을, 눈이 가려진 복종이 아닌 자유의지로 나아감을 바랐다. 하지만 실상 대다수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대다수의 인간은 절대자에 대한 복종으로 조용하고 겸허한, 연약한 존재에게 알맞은 행복을 추구한다. 신과 예수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자들은 소수란 말이다. 즉 신이 인간을 대단한 존재로 믿었기에 했던 저 대답은 인간을 더욱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그렇기에 신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소수의 인간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간’은 악마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지상의 빵을 위해 노예가 되고 자신이 따를 만한 자라고 믿는 이에게 눈을 감은 채로 복종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반은 대심문관 서사시를 통해서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 때문에 인간은 악마와 손을 잡을 수 있게 됐고, 자유로 인해 모든 것은 ‘허용’됐기에 심지어 신을 불태우는 것마저도 허용이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치 그 증거처럼 이반은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본다. ‘대다수의 인간’인 이반은 역시 악마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극 중 ‘까라마조프가의 피’로 대표되는 악으로 드러난다. 무대 중앙에 위치한 거울이 이반을 비출 때, 거울 안에 비친 이반의 모습은 그의 안에 있는 악마다.
이 ‘악’은 이반과 가장 닮았다고 말하는, 스메르쟈코프의 ‘간질’에서도 드러난다. 애초에 간질이란 질병 자체가 악마의 저주로 인한 병이라며 종교적인 병으로 치부돼왔다.
“(…) 뒤틀리다 침이 흘러나와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상쾌한 기분이야. (…) 믿기지 않겠지만 수치심은 진실한 고통이야. 발작이 시작되려나봐 내 몸속의 악마겠지. 간질이 내 몸에서 다 흘러나온다.”
스메르쟈코프는 발작이 오는 기분을 설명하며, 간질은 자신의 몸속의 악마이고 자신이 악해진 순간 ‘간질’이 몸에서 흘러나온다고 표현한다. 스메르쟈코프가 죽은 후 이반은 “나에게도 지금 간질이 흘러나온다. 아, 상쾌하다.” 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에게 흐르는 까라마조프 가의 피에, 스메르쟈코프의 간질 즉 악이 있음을 시인한다.
결국 ‘까라마조프가의 피’, 혹은 ‘까라마조프’적인 것은 모든 인간, 아니 ‘대다수의’인간이 손을 잡은 악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악의, 그리고 우리 안의 악마를 얘기하던 극은 그와 동시에 사랑을 노래한다. 망나니짓을 하면서도 자신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울부짖는 표트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그루첸카가 그립다고 노래하는 드미트리나, 아무도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기에 헛소리만을 사랑한다는 이반,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음을 고백하는 알료샤, ‘수증기’라는 의미의 이름마저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스메르쟈코프. 하지만 모두의 사랑은 비틀려있다.
표트르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만 믿기 때문이다. 결국 표트르는 실재하는 형상만 볼 뿐, 그 내면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수많은 여자들과 자도 그의 내면은 공허하다. ‘사랑은 내 안에서 수십 번도 넘게 집을 짓는다’는 절규는 얼핏 풍족한 사랑을 말하는 듯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집’을 만드는 것은 건축 구조가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사람들과 온기다. 표트르의 사랑은 그가 실제로 만질 수 있는 건축물, 공허한 공간만을 만들 뿐 단 한번도 ‘집’이 되어본 적이 없다.
드미트리는 아버지와도 내연의 관계가 있는 그루첸카를 절절하게 사랑한다. 그녀만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노래하고 그리움에 몸서리친다.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하는 일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치는 것이나, 자신의 약혼자를 비정하게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드미트리는 일상생활에서도 타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이다. 온 몸으로 사랑을 외치지만 그의 일상은 사랑이 아닌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반은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세상은 ‘헛소리’를 기반으로 해서 이뤄져있고, 헛소리가 없다면 이 세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모든 말들이 헛소리인 이유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헛소리들을 사랑한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이반은 자신에게도 사랑을 갈구했던 마음과, 자신이 지식에 집착했던 이유조차도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알료샤는 신의 이름을 빌어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폭력적이고 저열한 자신의 아버지조차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형제이기 때문에 드미트리를 믿고 사랑한다. 하지만 알료샤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다. 자신을 사랑한다며 고백해오는 여인에게 동정심으로 대답을 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버지도 사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외면하고 싶었던 등. 아무것도 사랑해 본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모두를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거냐며 씁쓸하게 읊조리는 그의 독백은 그가 외쳐왔던 ‘사랑’의 무상함을 말한다.
스메르쟈코프는 어린 고양이, 아이를 들며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비천하게 만든 아버지와 어머니도 사랑하며, ‘수증기’라는 자신의 이름조차 사랑해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도없이 반복되는 이 독백에서 자신의 이름에 관한 것만은 ‘사랑해’가 아니라 ‘사랑해야지’라는 다짐으로 끝이 난다. 수도 없이 다짐하지만, 끝까지 그는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해’로 끝냈던 앞선 독백들도 마찬가지다. 어린 고양이를 사랑한다면서 고양이 살해를 즐기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면서 끝내 자신의 손에 아버지의 피를 묻힌다. 그의 고백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결국 그는 자살로서 자신의 삶에 복수를 한다.
“악마는 신과 싸우는 게 아니었어. 아름다움과 싸웠던 거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싸우는 거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악마는 우리 마음속에 있으니까. 자기 몸에 침을 뱉을 수는 없으니까. (…) 우리 몸에 살고 있는 고통- 까라마조프.”
모두가 뒤틀린 채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혐오한 이들은 결국 자신들에게 있는 그 ‘악마’가 자신들 안에 ‘사랑’과 싸우고 있었음을 말한다. 악마는 신이 아니라 아름다움, 즉 사랑과 싸워왔으며 아무도 사랑하지 못 했던 이유는 자신 마음속의 악마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었노라고 말이다. 자신의 안에 있는 아버지의 피를 혐오해마지 않았지만 동시에 사랑했던, 사랑이자 고통인 자신 안에 ‘악’, 그리고 아버지. 결국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가 노래하고 있던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하지 못해, 혹은 사랑해 악으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만 자신들 말이다.
책으로 읽어도 어려운 내용을 뮤지컬로 묘사해 낸 지라 단순히 뮤지컬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는 반의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충분히 매력적인 극이었다. 하지만 이 치명적 단점마저도 넘어간 내가, 정작 견딜 수 없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첫 번째는 바로 이 극의 주제였기도 한 ‘사랑’이었다.
원작에서도 사랑을 말하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낀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사랑을 노래하는 방식은 조금 갑작스럽다. 특히나 드미트리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발없는 새’라는 넘버는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아버지 날 버리지 마세요. 발 없는 새가 되어 나는 하늘을 날고 있어요. 쉴 곳 없어서 날고만 있죠. 발이 없는 작은 새는 날 때부터 너무 슬퍼요. 울고 있어요.”
뮤지컬에선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원작에서 표도르는 ‘아이들의 존재를 잊었다’고 표현될 만큼 아이들에게 무심했고, 만약 주변의 도움 없이 방치되었다면 아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을 환경에 놓여있었다. 이들이 그렇게나 저주하는 ‘까라마조프가의 피’도 결국은 아버지에 대한 경멸에서 기인했다. 자신들의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그 자신들조차 방치했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감정은 그 짧은 시간에 설득력을 가지기엔 무리가 컸다. 물론 모둔 인간은 사랑을 갈구하고, 증오는 ‘나를 사랑했어야 할’ 아버지가 그렇지 않다는 것에서 기인한 바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봐도 혐오스럽고 저열한 아버지를 사실은 사랑했고 사랑받고 싶었음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는 표트르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반과 알료샤 형제가 옷장 안에 숨어서 어머니께 함부로 대하는 아버지를 지켜볼 때, 표트르의 망령은 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얼핏 어떤 여성의 실루엣으로 보인다. 표트르 또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고 그래서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런 표트르는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 표류했던 사람이고,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마치 이반과 알료샤의 어머니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양, 그리워하는 양 묘사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모든 악행과 배덕은 결코 ‘사랑’이란 키워드로 봉합되지 않는다. 그의 행동의 동기가 사랑이었다고해서 그가 ‘나약하고 불쌍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많은 부분에서 그는 가해자였다. 그 스스로 부족한 인간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른 이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변치 않는다. 그런 그를 마치 후회 중인,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단지 깨닫지 못했던, 용서받을 수 있을 만큼 안쓰러운 개인으로 표현한 것은 굉장히 거북했다.
두 번째는 간질의 묘사다. 물론 간질의 상징성은 무척이나 잘 알겠다. 앞서 서술했듯이 스메르쟈코프의 간질은 그 자체로 ‘악’을 은유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질에 대한 묘사 방법에는 의문이 들었다. 스메르쟈코프는 자신의 간질 내용을 하나하나 서술하면서 그 과정을 몸으로 묘사한다. 그 광경은 괴이하다. 그러면서도 스메르쟈코프는 웃는다. 간질은 차라리 ‘상쾌하기까지 한 기분’이라고 서술하는 그는 기이하기 짝이 없다.
간질 발작이 실존하지 않는 질병도 아니고, 실존하며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는 병인데 굳이 무대 위에서 하나하나 낱낱이 재현했어야하는 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최근 교통사고나, 살인, 혹은 성폭행에 관련된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폭력성’을 제거하거나, 혹은 ‘관음적인’ 요소들은 제거하는 식의 연출들을 많이 봐 왔기에 더더욱 불쾌감이 느껴졌다. 간질이란 소재를 쓰면서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전시하지 않는 방법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관객으로 하여금 괴이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시한 게. 혹여라도 간헐적 발작을 앓고 있거나, 그런 지인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이 극을 본다면 과연 유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의미를 위해서 도덕성을 포기했다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사실 1600페이지나 되는 대문호의 작품을 연극도 아닌 뮤지컬로 풀어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충분히 잘 해 주었다. 프리뷰 당시 거창한 포부를 늘어놓았던 것과 달리 실제 원작은 1권 정도밖에 읽지 못했는데 그 방대한 분량과 내용을 알고나니 더더욱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최대한 선택과 집중을 잘해 원작을 잘 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원작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고, 처음 이 극을 보는 사람이 과연 약 2시간의 시간동안 집중력을 끌어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나약하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알료샤의 말처럼, 나약한 우리들에게 사랑은 정말이지 단 하나의 구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나의 나약함의 변명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악했을 때, 나도 나약하고 사랑받기 원한다는 말로 나를 정당화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인간은 나약하고 모두가 사랑받길 원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면서도, 나의 나약함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을 사랑하면서도, 이를 내 악함의 변명으로 삼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