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어릴적 나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광팬이었다. 가나출판사에서 출판됐던 시리즈는 아름다운 그림체와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 책임져” 등의 재치 있는 대사들로(본 대사의 출처는 해당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이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도서관만 가면 너나할 것 없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붙잡고 읽고 있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바람둥이 신 제우스와 헤라 그리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태양의 신 아폴론과 달의 신 아르테미스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지는 이야기라면 그저 흡수하기 바빴던 어린 시절, 나는 아주 쉽게 헤라를 ‘악역’의 자리에 놓곤 했다. 제우스와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여인들이 헤라 때문에 불행해졌고, 제우스와 그 여인들의 아이들 또한 자주 곤경에 처하곤 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후에 아테네 아프로디테와 함께 ‘황금사과’ 논쟁에 빠지며, 이 사건은 트로이전쟁의 시초가 되기까지 하니 헤라에 대한 나의 인식은 가히 바닥이었다. 심지어는 경멸적인 느낌을 담아 ‘나쁜 아줌마네’라고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반면 아르테미스는 나의 우상이었다. 일단 ‘달의 여신’이란 이미지가 주는 세일러문적인 느낌과 함께 ‘처녀’라는 점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처녀’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그 시절, 나는 ‘처녀’를 단순히 청초하고 순수한 여성으로 받아들였다. 숲 속을 뛰어다니며 처녀인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내 로망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오리온과의 사랑에 실패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였나,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 집에 해당 만화 전권이 있었다. 책을 마주하자마자 반가움이 앞섰고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곤 그 자리에서 다시 읽었었다. 그때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헤라 또한 아름다운 여신인데, 왜 제우스가 그 수백 수천번의 바람을 필 동안 헤라는 단지 ‘제우스를 잡으러 다니기’에만 급급했던 것일까. 그리고 사실 잘못은 제우스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이라기보다 헤라의 믿음을 배신한 제우스에 있는데 헤라는 왜 여인들만을 벌하는 것일까. 자신의 가정을 지켜내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헤라가 대체 왜 가정의 신인 걸까.
의문점이 생긴 건 아르테미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돼 사슴이 되는 저주에 걸리게 된 악타이온에 관해서도, 과연 의도가 아니라 ‘우연한’ 그 일이 마치 아르테미스의 무언가를 손상한 마냥 인간에게 그 정도 대가를 치르게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리온의 이야기에서도 큰 이유 없이 무작정 오리온을 싫어하고, 자신의 동생의 연인을 죽게 만드는 아폴로와 그런 아폴로에게 큰 반감을 표하지 않는 아르테미스가 의아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점들을 해소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단지 내가 나이가 들면서 감상이 바뀌었다고만 생각하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편이나 토막으로 그리스 로마신화의 일부분을 듣거나 상기시키는 일은 있었어도 다시금 예전 그 만화를 읽을 때처럼 각자의 신들의 입장에 이입해가면서 그들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공연소식을 보게 됐다. 보통 남성 신을 중점으로 서술됐던 신화 이야기들과 달리 여성의 시점에서 서술된다는 것이 신선해서 마음에 들었고 또한 이 연극이라면 오래 전 어린 내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를 넘어서. 잘 몰랐고 또 한편으로는 내 일이 아니었던(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애정관계나, 여성에게 지워진 스테레오 타입들, 사회적 시선 등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니 시놉시스를 읽는 것만으로도 벌써 꽤나 많은 부분에 공감하게 됐다. 신화가 쓰여진 시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그럼에도 세여신이 고민하는 내용은 현대의 우리가 고민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의 세 여신이 현대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어릴 적 즐겼던 신화를 성인이 되어버린 내가 고찰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정말 ‘시대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이미 ‘페미니즘 입문극’이라는 찬사까지 받은 연극이라고 한다! 가장 고루할 수 있는 신화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함으로써, 페미니즘은 정말이지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것 같아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시놉시스>
제우스의 명으로 올림포스의 12신이 소집된 날. 모임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게 된 헤라와 아프로디테, 그리고 아르테미스.
과거 아름답고 도도하기로 유명했지만 제우스의 바람기 때문에 질투의 화신으로 전락한 헤라, 사랑의 여신으로 불리며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지만, 실상은 매일 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는 욕정의 여신 아프로디테,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오리온을 깊이 사랑하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가벼운 참견으로 시작된 세 여신의 대화는 점차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 변해가며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나는데... 본인의 능력을 꽃피우지 못하고 남편 뒤만 쫓는 한심한 여신이 되어버린 헤라, 진실한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색을 탐하는 데만 집중된 아프로디테, 본인의 욕망을 접어둔 채 처녀임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답답한 아르테미스. 서로를 비난하던 그들이 마주하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과연 비난의 칼날을 거둘 것인가?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페미니즘 입문극 -
일자 : 2020.02.29 ~ 2020.03.29
장소 : 콘텐츠 그라운드
티켓가격
전석 40,000원
주최/주관
창작집단 LAS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90분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 co.kr)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