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하지만 제일 못하는 것
박총 작가님을 좋아한다. 작가이자 수도사, 낭만가이자 목사인 그를 좋아한다.
특히나 그의 책 "욕쟁이 예수"를 읽었을 땐 뒷통수를 맞아 얼얼한 상태로 신문물에 정신 못차리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은 나의 숨통을 틔어주었고, 앎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아니 넓은 곳에 감히 발을 디딜 용기를 내게 해주었다. 그렇게 삶의 태도를 다잡게 해 준 저자의 책이 "읽기의 말들"에 이어 유유 출판사에서 두번째로 출간되었다. 당시 서울국제도서전을 통해 처음 나온 따끈한 책을 구매하고, 얼른 읽을 생각에 벅찼지만 생각보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 페이지를 빨리 넘기며 후루룩 흡입하기 보단 음미하며 천천히 읽게 되는 책이다. 유유의 "말들"시리즈는 인용문과 저자의 에세이가 반복되어 나오는 형식으로 출간된다. "말들"시리즈의 묘미 중 하나는 다양한 저자의 명서 속 인용문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서는 또 다른 독서를 낳게 되는데, 작가가 고심하여 선정한 반짝이는 인용문이 많이 펼쳐질 때 각자의 마음에 콕 박히는 별같은 문장을 발견할 때의 기쁨이 이 책을 추천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117pg
작가는 본인의 경험을 글에 녹여내 우리의 매일의 일상 속 지나쳤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의 말을 무심결에 끊고 자기 경험으로 넘어가 어느새 대화의 주인이 되어 마구잡이로 상대를 이끌어 나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친구의 말은 사라지고 그 말의 씨앗은 심겨지지 못해, 열매 맺지 못한다. 무심코 끊은 상대의 말들을 이으면 지구 한바퀴를 두를 수 있으려나...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을 때에야 비로소 상대의 진심이 나온다고 저자는 여러 책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잘 알아듣도록 이야기해준다. 자주 만나는 친구에게 먼저 실천해보면 좋겠다.
"사랑의 첫째 의무는 듣는 것이다."
옳다. 다들 자기 말 좀 들어 보라고 아우성치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상대의 말을 흥건하게 들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127pg
세상엔 예상치 못하게 덮쳐오는 고통이 가득하다. 그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겐 어떤 말을 건내야 할지 많이 고민하곤 했다. 그리고 이야기하다보면 내 말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느낄 때 괴로워하며 무기력 해지곤 했다. 저자는 말한다.
"삶의 난폭함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아무 말도 못 하는 속수무책으로 화답함이 옳다. 고통의 곁에 무기력하게 서서 신음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만이 고통을 덜어낸다. 197pg
항상 배려한답시고 할 말을 골라내고 정제하느라 바빴는데, 그 마저도 내 욕심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 속에 속수무책으로 어떤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태의 그와 그저 함께하며 나 역시 속수무책이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위로이고, 경청이구나. 내가 경험하지 않은 삶에 말을 보태느라 많은 시간을 써온 지난 날을 반성하게 된다. 그저 함께 있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너의 곁에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일을 해주는 것이 바로 경청인데 나는 그저 번지르르한 말 한 번 하고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상대의 고통보다 앞서 어떻게든 힘을 내길 바란게 아닐까. 상대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경청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을 경청하느냐 역시 못지 않게 중요하다. 어떤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가.
고독 속에서 들리는 미세한 소리. 심장소리. 살게 하는 소리를 포착하고 그 소리에 머물거나 떠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진다. 그러려면 고독이 필요하고 고독은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귀는 어떤 내적인 고독과 침묵에 잠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217pg. 토머스 머튼 "고독 속의 명상" 인용문.
"떠나라는 북 소리를 듣는 귀에 복 있으라. 내가 이룬 것에 집착하지 않는 그대는 이미 자유인이로다. 우리가 북소리를 들어도 선뜻 떠나지 못함은 기껏 내린 뿌리를 다시 뽑아 이식하면 남들보다 뒤진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 203pg.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구절 인용을 시작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으로 끝나는 이 페이지는 나는 그간 어떤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왔는가 생각하게 한다. 모두 다 춤추는 음악도 좋지만 나만의 음악을 듣고 그 장단에 맞추어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얼마나 못 듣고 또 안듣는 사람인지 사무친 각성이 일어나야 듣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자기성찰을 안겨 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19pg
"경청" 단순히 귀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에 집중해서 듣는 것을 넘어 삶의 중심을 관통하며 나와 그리고 타자와 관계 맺는 일이자, 서로를 살리는 행위이다. 책을 보며 많이 반성했고, 실제로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말을 무심코 끊지는 않는지 관찰하게 되었다. 타인 뿐 아니라 침묵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듣고 발견하는 경청, 자연을 지긋이 바라보며 충분히 만끽하는 경청.
책을 덮은 후 경청이라는 게 이토록 온 존재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인생을 다 들여 한다 해도 완벽히 해 낼 수 없는 게 바로 경청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무거우면서도 잘 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듬뿍이 든다. 그렇게 경청하며 살다보면 누군가 나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경험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고 경청이 우리 생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빚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