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큰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2023년 7월 18일(화)
오전에 친구가 집에 놀러와서 아주 간단한 브런치를 먹고, 오후에 블로그를 한 다음 저녁에 남편과 양재천으로 산책을 갔다.
2023년 7월 19일(수)
평소처럼 집에서 일을하다가 저녁에 혼자 길마중길 산책을 나섰다. 조금 걸었는데 집에 가고싶어져서 중간에 산책길을 벗어났다. 학교가 나왔고 가로등 아래의 분홍색 담벼락이 정말 예뻐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걷다가 우회전을 해서 계속 학교를 따라 걸었는데, 평소랑 다르게 초등학교 정문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경비 아저씨가 나와 계셨고 그 앞에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간에 주고가는 대화도 없어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나도 한동안 서있었다. 평소에는 무슨 일인지 바로 물어보는 성격이나, 이상하게도 암울한 분위기에 섣불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먼발치에서 서있다가 상황에 진전이 없어 집에 가서 검색을 해봐야겠다 생각하며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장봐온 재료들을 정리하고 까먹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2023년 7월 20일(목)
국립중앙도서관에 갈 일이 있어서 오전 일찍부터 집에 나섰다. 도착해서 여유가 생겨 카톡을 열었는데 친구가 '서울 초등학교 새내기 교사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기사를 공유해주었다. 얼마 전에 교사 폭력 사건도 발생했던 터라 연이어 터진 교사에 대한 비보에 급속도로 슬픔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서울 초등학교'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검색을 하였고, 곧바로 그곳이 서이초이며 어제 사람들이 정문에 몰려있었던 것도 그 일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와 같이 학교에 출근하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학교가 마친 뒤 교사들이 추모를 하러 서이초에 모일 것이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엄청난 분노와 함께 벌써부터 이 사건이 하나의 해프닝으로만 지나갈까 하는 걱정과 무력감을 공유하였다. 분노와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 현실이 매우 씁쓸하였다.
나는 교육학과 출신이므로 주변에 선생님인 친구들이 많지만, 신기하게도 친한 고향 친구들 중에서도 선생님인 친구들이 있다. 그렇기에 연구를 통해 교사 분들의 고통을 접하기도 하지만, 친구들을 통해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듣기도 한다.
한 초등학교 교사 후배는 나에게 학부모 민원으로 인해 '처음으로 교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 적이 있고, 그말은 내 마음속에 두고두고 남아 있다. 다른 교사 친구들도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공유할 때, 종종 학교에서 학부모로 인해 고생했던 사건들을 얘기해준다.
연구를 통해 만났던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교사 사회에 짙게 베어있는 두려움과 무력감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과 무력감의 생성 뒤에는 거대한 사회∙문화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선 소비자주권주의가 만연해 있는 현실은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가 교육 공급자와 교육 수요자의 관계로 변하게 한다(권미경, 김천기, 2015). 그리고 현대의 저널리즘은 신공공관리 책무성에 초점을 두어 정책 실패보다는 도덕적 스캔들로 구성된다(Djerf-Pierre et al., 2013). 그렇기에 외부환경과의 마찰이 발생할 수 있는 경우 학교나 교육청의 관리자는 종종 책임 회피 및 전가 혹은 사안의 경미화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교사는 좁게는 학교 혹은 넓게는 교직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혼자서 부단히 노력하며 오롯이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조금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보겠다. 교사가 학부모의 불만 혹은 학부모와의 갈등을 본인 선에서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여 학교장에게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한다'라는 미움을 사게 되는 경우, 교사는 기피 학년 및 업무 배정 혹은 승진 및 성과급을 위한 평가 점수 등에 있어 각종 불이익을 경험헐 수 있을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소외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선후배로 구성된 교직 사회 네트워크를 통해 퍼지게 되어, 이 학교를 벗어나더라도 그 소문과 평판의 굴레에서는 벗어나기 힘들 수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힘이 없는 교사들일수록 저항하기 힘들며, 그런 점에서 신임 교사는 교직사회에서 가장 최약체이다. 특히 초등학교 교사의 경우 이런 상황에 놓일 확률이 높은데, 초등 교사의 경우 특정 지역의 교대를 나와 해당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교사들과 학교 관리자들 그리고 장학사까지 거대한 선후배 네트워크의 일원일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제는 학부모 커뮤니티를 통해 전국적으로도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시대 같다. 서이초 교사를 추모하기 위한 프로필을 설정한 교사분께 한 학부모님께서 그 프로필을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그 메시지가 익명의 형태로 교사분에 의해 온라인상으로 퍼지자 학부모님 또한 여러 죄목을 언급하며 단톡방과 커뮤니티를 통해 신상을 공유하고 계신다고 한다. 이 사건 자체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이 글에서 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이제 한 교사에 대한 비난이 전국적으로 재빠르게 퍼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학교에서 교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남편에게는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지'와 같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 결국 터졌구나.'와 같은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아마 학교의 현실(혹은 이러한 사회구조적인 현실)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기에 서이초 앞에서 많은 분들이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미리 이 사건을 막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의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이다. 유사하게 많은 비극에 대해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얘기하는 것도 이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물리적으로도 서이초는 우리집 근처에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도 이 사건과 그 근간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문제들은 늘 나의 곁에 그리고 우리 곁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건으로 인한 건강한 분노의 목소리에 목소리를 얹는 것, 그리고 절망으로 더 큰 무력감에 빠지지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동력으로 삼아 더 현상을 파헤치고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내도록 펜을 드는 것이다. 선생님을 마음 속으로 깊이 추모하며, 희생이 헛되지 않게 현실이 변화할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