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날이 새고 얼마 있다 잠이 깬 나는, 좁은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선생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들고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본다. 5시 5분이다"
소설의 첫 시작이다. 시간이 흐르는 데로, 눈길이 가는 데로, 무심한 척 글은 시작된다. 가장 존경하는 노 건축가를 소개하는 글의 시작이다. 가장 부지런하며 군더더기 없는 분, 가장 존경하는 분을 소개하는 글이다. 주인공이 건축사사무소에 취직을 하게 되며 입사 초에 겪었던 일들의 이야기이다. 사무소 직원들과 사무소의 건축 일들,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가 함께 이루어진다.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작가의 말들을 씹어 먹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이래서 추천을 하나보다.
"해가 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며, 모든 것을 삼킨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순식간에 숲의 윤곽이 떠오른다. 일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싱겁게 밝아온다"
아침이 싱겁다고 한다. 맞아 싱겁다. 일출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긴장되고 조마조마한 것이다. 해가 떠오르면 순식간에 세상이 밝아온다. 참 싱겁다. 참 잘 꼬집어 쓰는 작가다.
"안개다.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 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 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 밀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
안개 색은? 초록이다. 맞다 그렇다. 안개는 색이 없지만 초록 냄새가 난다. 안개 때문에 새도 지저귐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당장 유리창을 열고 안개 색을 맡고 싶다. 코를 킁킁거리며 말이다. 안개는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안개가 나를 감싸앉는다. 안개는 스며드는 것이다.
"침실은 너무 넓지 않은 쪽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면을 도와. 천장도 높지 않은 편이 좋아. 천장까지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유령이 떠돌 여지가 생기거든.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 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 다이닝 키친의 경우, 요리하는 냄새가 좋은 것은 식사하기 전까지만이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싫어지지. 주방의 천장높이와 가스풍로, 환기통 위치가 냄새를 컨트롤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야"
건축가의 꼼꼼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글을 따라 읽으며 밤에 깨서 화장실 가는 장면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무릎에 멍이 많다. 밤마다 무릎이 깨져서 말이다. 손을 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다.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건축가이다.
"잎사귀 스치는 소리와 매미, 벌레, 새소리가 한데 섞여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린다. 풀과 잎사귀 냄새를 머금은 약한 바람. 올려다보니 주변보다 훨씬 밝은 파란 하늘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소리가 한데 섞여 쏟아져내린다. 여름의 끝은 그렇다.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모두 쏟아져내리는 중 하늘은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쨍한 파랑이다. 오늘 가을 하늘도 쨍한 파랑이었다.
읽는 곳마다 쉼표가 필요한 책이다. 단어 단어들이 나를 붙잡는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430쪽의 책의 두께도 있었지만 작가의 자연(산과 나무, 벌레, 새)의 생생한 묘사와 건축물의 의미와 이해 능력, 인물들의 특징과 대사 표현들은 하나하나 오래오래 되씹어야 하기 때문이다. 몰아치는 긴장감 없이 처음부터 쭈욱 여유를 가지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시간을 잊고 내면에 장면들을 그리며 천천히 읊조리며 읽는 책이다. 부디 모든 분들이 이 책을 즐겨보셨으면 한다. 이 책을 읽고 마음의 평화를 느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