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PM 회고
2026년 1월은 유독 뜨거웠습니다. 새해를 야심 차게 시작하려는 각 부서의 의지가 담긴 요청 사항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니어 시절에는 위에서 논의가 끝나고 정리되어 내려오는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집중했다면, 시니어 PM이 된 지금은 모든 요청을 주체적으로 검토하고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수많은 '거절'을 이어가며 심리적인 불편함도 느꼈고, 거절을 준비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리소스를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치열했던 과정 속에서 배운 기록들을 이곳에 남겨봅니다.
과제의 우선순위는 대개 비즈니스 임팩트와 리소스를 수치화한 명확한 근거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객관적 지표 뒤에 숨은 '사람의 노력'까지 숫자로만 치부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리소스가 없다"거나 "순위가 낮다"는 단편적인 말로 소통을 매듭짓는 것을 경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업부마다 규모의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거대한 임팩트를 내는 도메인이 있는 반면, 전체 파이에서의 비중은 작아도 제품화를 통해 유의미한 변화를 꿈꾸는 작은 부서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들의 치열한 고민이 단순히 '숫자의 논리'에 밀려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요청에는 하나의 문서가 나올 정도로, 많은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정중한 거절의 문서를 작성하는 데 적지 않은 에너지가 쓰였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는 협업의 신뢰를 쌓기 위해 기꺼이 지불해야 할 '필수적인 비용'이라 믿고 있습니다.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크게 아래와 같은 단계를 거쳐서 검토를 했던 것 같습니다.
(1) 요청받은 솔루션 너머의 문제에 집중하기
요청을 받았을 때 제가 가장 먼저 공을 들이는 것은 상대방이 제안한 '솔루션'이 아니라 그들이 해결하고 싶어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기능을 만들어주세요'라는 요청을 '우리는 지금 이런 불편함을 해결하고 싶습니다'라는 논의로 전환시키는 과정입니다.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나면, 대대적인 제품화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길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 조용한 저녁 시간마다 유관 부서의 전략 문서나 대시보드를 파고들며 그들의 고민을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이런 문서와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읽는 것으로도 어느정도 문제점에 공감할 수 있도록 동화되면서, 이후 커뮤니케이션 비용은 오히려 효율적으로 개선되었던 것 같습니다.
(2) 대안 제시하기
문제가 명료해졌다면 그다음은 대안을 살핍니다. 시스템 개발 없이 운영 프로세스 개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거나, 현재 진행 중인 다른 프로젝트가 완료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로드맵을 안내합니다. 때로는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당장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미봉책(Quick-in)'을 함께 제안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못 합니다"가 아니라 "이런 방식이나 이 시점에는 가능합니다"라는 대안을 공유하는 것은, 거절의 부정적 에너지를 협력의 에너지로 바꾸는 핵심입니다. 제안자가 "내 의견이 무시당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는 것, 즉 그들의 비즈니스적 통찰에 공감하는 태도가 사람 사이의 일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3) 기회비용과 데이터를 통한 명확한 근거
거절의 이유는 언제나 투명하고 명료해야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절은 상대에게 거부감을 주지만, 충분한 맥락이 담긴 거절은 오히려 조직 차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논리적인 선행 조건과 본부 간의 우선순위 정렬입니다. 단순히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과제 수행을 위해 필요한 객관적인 조건들을 짚어줍니다. 만약 선행 작업이 부족하다면 이를 협업의 새로운 시작점으로 제안합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행 작업 A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분기에는 함께 A를 준비하며 다음 분기에 검토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문제 해결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둘째,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전략적 선택임을 공유합니다. 거절의 근거를 마련할 때 저는 데이터와 상위 지표를 활용합니다. 이때 가장 핵심이 되는 논리는 바로 기회비용입니다. 이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확보한 리소스로 우리가 어떤 더 큰 가치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청 팀이 속한 본부의 상위 우선순위나 KPI와 대조하여, 지금 이 시점에 해당 과제가 동력을 얻기 어려운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해당 본부 내에서 다시 검토하도록 전달합니다. 이는 제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조직의 전략적 방향성에 근거한 결정임을 명확히 하는 과정입니다.
(4) 거절된 아이디어의 '사후 관리'
지금 당장 어렵다고 해서 그 아이디어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는 제품 로드맵 문서에 별도의 'Sub Track' 영역을 만들고, Main Track의 과제와 연결성을 검토하고, 거절된 아이디어나 요청들이 가시적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한 판에 정리해 두면 중복된 논의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협업 부서에도 '우리의 의견이 휘발되지 않고 소중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정중한 거절을 준비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늘 미안함과 '나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쩌지'라는 심리적 부채감이 있었습니다. 동료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PM이라는 역할 자체가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멘토에게 털어놓았을 때, 멘토께서는 저에게 '롤플레잉(Role Play)'이라는 관점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PM으로서 거절하는 것은 조직 전체의 기준(Bar)을 높이기 위해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며 느끼는 감정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라.
이 조언은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No'라고 말하는 순간은 동료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퀄리티와 리소스의 효율성을 지키기 위해 PM이라는 배역에 충실한 순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 역할을 단단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조직 전체의 의사결정 수준이 높아진다는 확신도 얻었습니다.
이처럼 2026년의 첫 달을 보내며, 논리적인 '거절의 기술'과 인간적인 '공감의 태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이라는 PM에게 필요한 일을 충분히 배웠던 것 같습니다. 몸은 고된 1월이었지만, 조금씩 쌓아올린 신뢰들이 앞으로의 협업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