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4 살롱 드 경성_김인혜
김병기(1916~2022)는 잭슨 폴록의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 알지 못한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 않나. 다만 그런 불확실성을 안고서도,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도전할 뿐! 그것이 인생이니까. 315p
아버지 김찬영(1893~1960)은 평양 최고 갑부 아들로 희대의 한량이었다. 김찬영은 중학생 때 도쿄에서 유학했으며 1912년에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런 이의 아들 역시 도쿄에서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예술가 집단에 합류했다. 자유를 외치던 김찬영은 아들을 돌볼 일 없었고 김병기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판단을 평생 유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훗날 김병기는 미국에서 반세기를 보내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감성과 이성, 구상과 추상,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 이런 종류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그것도 적극적으로 속하지 않기를 추구했다고 했다. 이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313p
“시대가 아무리 험난해도 부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삶을 영위했던 이들이 있다. 이 부부(도상봉, 나상윤)가 그랬다. 한국 근대화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대부분이 비극적인데, 이 부부처럼 소소하고 아름다운 인생 이야기가 하나쯤 있는 것도 기쁘지 아니한가. 사실 ‘평범한 행복을 유지하는 삶’이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이란 진정한 용기와 마음의 자유를 지닐 때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1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