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
나는 내가 고지능자인 줄 알았다. 어릴 적부터 범상치 않은 일화들이 꾸준히 따랐기 때문이다.
적성 검사 논리 추론 영역에서 소수점 단위가 잘린 상위 0%를 기록한 것도, 패턴 디자인이라는 것을 배우자마자 그 자리에서 수십 개의 나만의 패턴을 만들어 선생님마저 내 자리 앞에서 구경하게 만든 것도…. 다 천재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연거푸 낙제해 학사 경고를 받는다거나. 천재가 F 세례를 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웩슬러 지능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인생 최대의 미스터리가 풀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꼼질거리는 입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내 인생이 <트루먼 쇼>라면… 지금 이 순간에 60초 광고를 넣는건데!
IQ: 95
내 지능은 95!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름이 전혀 다른 대야미역과 수리산역을 착각해 잘못 내린 것도… 멀쩡한 유선 공책에 줄을 의식하지 않고 글씨를 썼던 것도… 가스레인지에 머리카락을 한 뭉탱이 태워 먹은 것도…. 다 지능이 95이기 때문이었다! 95라는 수치가 내 머리 위로 땅 떨어져 누르는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인생에서 뚜렷한 성공을 한 경험이 없다. 이에 대해 고상한 척 말할 기회를 잃은 것이다.
"알고 보니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런건가보더라고요. IQ가 120이었어요~"
하다못해 특정 영역에선 천재고 나머지가 깎아 먹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여쭈었다. 나의 아픈 손가락, 기억력! 혹시 기억력이 평균보다 아주 낮았냐고…. 허나 모든 게 평균치란다. 지구는 둥글지 않다. 평평하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의사 선생님은 위로의 한마디를 던져주었다. 지적 잠재력은 높아 보인다나. 다만 그 높은 지적 잠재력이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인지 왜곡 때문이며, 어쩌고 저쩌고…. IQ가 95이기에 나머지 말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인지 왜곡이란 건, 흑백 논리를 가지고 있다거나 일반화를 과도하게 한다거나…. 타인의 의도를 묻지도 않고 스스로 판단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그런 적이 몇 번쯤 있겠지만, 심하면 병증이라고 한다.
아무튼, 지적 잠재력이 높다는 말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마치 이런 것이 아닌가. "우리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낮아요."하는, 자식 아끼는 부모님! 혹은 "애가 못생기기는 했는데 착해요."하는, 소개팅 주선하는 친구!
뭐, 그런다고 내 사랑하는 아가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위안을 삼았다. 50쪽짜리 기획서를 완성해 낸 업적. 이건 지능이 150이든 95든 멀쩡하지 않은가. 물론 95짜리가 만들었다는 불명예가 따라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