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
리스페리돈을 먹으면 마음이 평온하다. 분노도 얕고, 슬픔도 얕고, 기쁨도 얕다. 감정을 빼앗겼다는 기분 마저 든다.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5초 이내에 분노의 파문이 잠잠해지고 만다.
공허한 기분과 같냐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약간 다르다. 그냥 말 그대로 평온해진다. 약을 먹기 전 느꼈던 감정들과 비교하면, 내가 살아있지 않은 것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다. 음…. 정말 묘하다.
누구나 이런 평온한 상태를 기본값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나와 평생을 함께한 공격성과 우울감은 역시 소각되어야 마땅했을까? 조금 그립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쁨에 팔딱팔딱 뛰어다니던 경조증 상태가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던 것 같다.
약을 계속 먹는다면 그때의 기분을 다시는 맛보지 못할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쉽지도, 어쩌지도 않다. 역시나 평온하다. 내일도 모레도 평온하겠지.
거센 감정의 회오리를 탈출한 긍정적인 일일 수도 있고,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부정적인 일일 수도 있고…. 진실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늘 평온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