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여유
7월 하면 떠오르는 여러 단어들을 생각해 보았다.
바다, 매미 소리, 장마, 팥빙수, 반팔 티셔츠, 그리고 무엇보다도 '냉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냉면이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든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어쩌면 나의 어린 시절 경험과 가장 깊숙이 닿아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기억을 천천히 꺼내 본다.
에어컨 하나 없이 선풍기 바람에만 의존하던 학창 시절의 여름.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던 7월의 어느 토요일, 학교에서의 지루하고 답답한 수업을 마치고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걸어오던 길. 땀으로 범벅이 된 셔츠가 등에 착 들러붙고, 목덜미에선 짜증이 땀처럼 흘러내리던 그 오후. 집 앞 골목을 돌아 대문에 다다르면, 꼭 그곳에는 먹다 남은 냉면 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오늘도 냉면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에 대문을 조심스레 밀어본다. 역시나 부모님은 바쁜 일상 속에서 점심을 직접 챙겨줄 수는 없어, 집 앞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냉면을 시켜두셨다.
냉면이라는 말에 속상할 틈도 없이 입안에 침이 고였다.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나도 그걸 원했으니까.
그렇게 받아 든 4500원짜리 시원한 냉면 한 그릇.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 안에서 육수에 잠긴 물냉면. 그 속에는 고기 한 점, 삶은 달걀 반 개, 그리고 얇게 썰린 오이와 배 한 조각이 소박하게 올려져 있었다. 어릴 적 나는 겨자를 넣지 않았다. 그저 식초 몇 방울을 톡톡 떨어뜨리고, 젓가락으로 휙휙 저어 국수 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한 입, 그리고 또 한 입. 입안 가득 퍼지는 시원함과 새콤달콤한 맛. 그 짧은 순간만큼은 더위도, 피로도, 모든 스트레스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정신없이 국물까지 마시고 나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오싹해졌다. 배가 차가워져서 장판 위에 그대로 누워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 걱정 없이 반나절을 그렇게 보냈던 평온한 시간들.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저 나른하게 흘러가던 여름 오후의 단순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냉면 한 그릇을 먹을 때조차 시간에 쫓기듯 바쁘게 후루룩 입에 넣고, 급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평화롭던 순간이 이렇게 멀어진 것은. 냉면은 여전히 먹을 수 있지만, 더 이상 그때의 여유는 쉽게 맛볼 수 없는 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냉면을 먹을 때마다 문득 그 시절의 나른한 여유와 평온함을 떠올린다. 바쁜 지금을 살아가면서도, 가끔은 어린 날의 그 무의미하게 여유롭던 오후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7월이 되면 어김없이 냉면 한 그릇 앞에 앉아, 기억 속의 그 평온했던 여름날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