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이 짜다, 싱겁다. 음식이 달다, 짜다
양이 적다, 많다.
식당 연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손님의 이런 말에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았다.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당시 완벽주의자를 지향하는 나는, 불만을 하나하나 들어 드리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해, 짜증 섞인 표정과 말투로 엄마에게 음식의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먹어보고 짠지 안 짠 지 느껴보라고, 왜 이렇게 간을 일정하게 맞추지 못하냐고. 엄마를 핀잔하고, 들들 볶았다. 초창기라 내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런지 손님의 모든 말이 심각하게 들렸다.
국이 짜면 뜨거운 물 부으면 되고, 간이 부족하면 양념을 더 드리면 되지 않냐고 엄마는 말하셨다.
그때 난 이 말이 정답인지 깨닫지 못하고 엄마에게 더욱 스트레스를 드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태연하게 대처하는 엄마를 좋아할 수 없었다. 응당 손님들께 맞추는 게 배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요리사의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100명 중 5명이 불만이 있다고 하여 우리가 개선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시간이 지나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오히려 우리 나름 식당의 색이 있었고 밀어붙일 강단(?)이 필요했다. 정말 맞춰드릴 수 있는 부분까지는 맞춰 드리되 우리 음식을 드리는 게 맞았다. 손님의 컴플레인은 당연한 거고 이해하되, 수정해 드릴 수 있는 부분만 알려드리는 게 정답이라 나중에 깨달았다.
국이나 덮밥이 짜다고 얘기하시면 지금은 뜨거운 물을 더 드리거나 , 밥을 더 드리거나 한다.
(누구는 맛있고, 누구는 짜고, 누구는 싱겁다 말한다.)
그 당시 나는 이해력이 부족했는지, 엄마의 설명에 대꾸하며 '그래도 손님이 먼저지', '엄마가 간을 잘 맞춰야지' 라 얘기한 것이 조금 부끄럽다. 엄마는 고구마를 2개 먹은 듯 답답했을 것 같다.
이처럼 타인의 목소리에 휘둘릴 때가 있다. 태풍에 끄떡없는 큰 소나무처럼 기본 뿌리, 중심이 잘 잡혀있어야 타인의 목소리에 내 기준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 엄마는 평생 우리들의 밥을 챙겨주셔 그랬던가,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처럼 잘 잡혀 있었다. 나는 아니었고.
국이 짜다고 했다가 등짝 스매싱을 맞았다.
드라마에 보면 식당에서 밥을 먹다 작은 솜털이 나왔다며 주인공을 구박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구박을 당하다가 멋진 남자가 구해주는 모습. 구해주는 '멋진 남자'처럼 되야겠다는 마음보다, 사소한 실수가 엄청 큰 구박을 받는다는 느낌이 내 안에 더 강하게 들어왔다.
그래서 당연히 심각하게 생각 해왔는 것 같다.
지금은 식당일에 장시간 노출되어 있어 그런지 유연하게, 손님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대처한다. 예전보다 실수도 적어졌고, 여유롭고 능글맞게 손님을 대했다. 심각하지 않은 걸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었고, 심각한 것도 유연하게 넘어갈 유연함이 점점 생겨났다.
그렇게 내공이 쌓여가는지, 점점 손님들이 나라는 인간을 신뢰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점점 자신감이 생겼고, 나의 베푸는 마음도, 배려의 마음도 커져갔다.
이처럼 대부분의 일에 불필요하게까지 무거운 느낌을 줄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엄마와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여태까지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사건은 심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조금 더 불편에 대한 저항이 줄고, 여유롭게 대처하는 '멋진 사람'이 되는 것, 남들에게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그 느낌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멋진 사람'인 것 같다. 엄마에게 '멋진 사람'이 되려 다짐해본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엄마와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