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을 받으며 가장 큰 얻음은 나의 슬픔에 대해 안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여러 어려움과 갈등들, 여러 자극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각자 자신이 가장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상황들을 벗어나리라.
방어일지 몰라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만의 방식과 회로를 갖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 길에 슬픔이 있었다.
파도같이 밀려드는 어려움을 두 손 가득 밀어내면서, 때로는 가족들을 지지하며 함께 맞서기도 하고 홀로 서있기도 하며 당당히 맞설 때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불현듯 밀려오는 슬픔이 있었다.
엄마의 슬픔을 같이 삼켜버리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침잠하기도 하고, 화내지 못하고 참다가 슬퍼지기도 하는 나의 감정회로 정착지는 슬픔이었다.
스무 살 중반 이후부터 일 년에 한 번씩은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갔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고 마음을 나누는 신부님이 계셨고 비행기값만 준비해 훌쩍 떠나면 마음 편히 쉬고 갈 수 있게 많은 것들을 준비해 주셨다.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혼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시간을 내주셨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대학생, 사회초년생에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자연이 좋았고 혼자 걸으며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제주도를 참 좋아했다. 그 아늑함이, 푸르른 자연이, 바다가, 넉넉한 신부님의 마음이 나에겐 언제나 풍요로웠다. 매년 제주로 훌쩍 떠나는 것이 반복될 때 나의 분석가가 스치듯 이야기했다. “가끔 나는 헷갈려요. 낀따씨가 사람을 피해 제주로 가는지, 사람을 만나러 제주로 가는지.”
그때쯤 나는 제주로 가면서 때가 맞으면 신부님께서 맡으신 청년 활동에 기꺼이 참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탁에 일부러 제주로 향하기도 하면서 제주에 아는 청년들이 제법 생겨났다. 관계가 생겼고 제법 돈독해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았고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따뜻했다. 나와의 시간은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길면 일주일, 이주일 머물다 가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고 순간일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제주에도 나의 관계들이 생겼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되면 연락을 하고 만나거나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 내가 제주로 향했던 마음들이 명확해졌다. 혼자이고 싶었다.
부모님이 갈등상황에 놓일 때, 엄마가 나에게 심적으로 기대어 오실 때, 내가 특별히 무언가를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은 그 갈등의 눈 안에 있었다.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각자의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있듯 우리 가족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생길 때 아버지의 답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특별히 경제활동을 하신 것도 아닌데 아버지의 답은 어머니였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해답이 되어주셨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분노와 화, 어머니의 슬픔과 불안을 마주해야 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고 이 과정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제주로 향했다. 모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분석가가 했던 말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되돌아보니 혼자이고 싶을 때 도망치듯 그곳으로 갔다. 자연은 내가 사는 곳에도 있었고 안식은 내가 사는 곳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 매년 향하던 제주 발걸음은 멈추었다. 훌쩍 떠나고 싶을 때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쉬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내 마음의 종착지가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는 건 나를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슬픔에 빠져들 때 기꺼이 슬퍼할 수 있었고 나를 친히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나무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더라. 그저 당연히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을 좀 더 의연하게 때론 좀 더 처절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