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을 기다리며 아파트 단지 내의 나무 벤치에 앉아 있다. 그렇게 화창하진 않은 하늘, 가로수로 길마다 총총 서 있는 나무들이 사이로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간다. 내 앞에 있는 것 중 가장 볼만한 건너편 가로수로 눈길을 돌렸다. 나의 몸통만 한 나무의 몸을 아래에서부터 찬찬히 훑어 올라가니 하늘이 보일 때쯤 나무의 결을 뚫고 무언가 빼꼼히 돋아나 있는 게 보였다. 하얀 꽃잎이었다. 무수한 가지에는 희끗희끗한 흰 봉우리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봄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만개할 기세였다. 그새 봄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뜬금없이 나의 고양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눈물을 욱여넣자 곧 원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골목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근래에 집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그나마 슈퍼에 갈 일이 생겨도 사려던 물건만 사고 들어와 유심히 가로수를 살필 일이 없었다. 동네를 천천히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원래 이 얘기 저 얘기를 쫑알거리며 걷는 나인데 조금 전 욱여넣은 싱숭생숭함에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왜 한숨을 쉬어?" 원이 물었다. 원래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사람에게 울지 마라거나, 혹시 우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더욱 눈물이 나는 법이다. 나는 그 말에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아니 아까 앉아서 널 기다리는데, 벚꽃이 피려고 하는 걸 보니까 앵오가 생각나는 거야." 하고 마스크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들을 닦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앵오랑 벚꽃은 아무 연관이 없지 않나? 나 왜 우니?
겁 많은 앵오는 여느 강아지들처럼 산책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는 벚꽃과 함께한 아련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하얀 꽃이 휘날리는 계절의 풍경과 검 갈색 털을 지닌 앵오의 모습은 더욱 연관이 없어 보였다.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원이 조심스레 얘기했다. "그런데...앵오랑 벚꽃은 관계없는 거 아니야?" 눈물 몇 방울 사이로 시답잖은 웃음이 터젔다. "나도 알고 있어. 나도 마침 그 생각을 했는데! 앵오랑 벚꽃이랑 아무 에피소드가 없지. 밖에 나가는 것조차 싫어했으니까." "그런데 왜 우냐!" 싱거운 웃음 포인트를 발견한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냥, 앵오 없이도 계절이 바뀌는구나 싶어 눈물이 난거 같애." "그렇지, 계절은 계속 바뀌지…." 그렇게 또 한참을 별말 없이 걸었다.
원은 세심한 언어로 내 맘을 위로할 줄은 모르지만, 앵오를 보내고 처음 만난 나를 길거리에서 아무 말 없이 팔벌려 안아주고, 앵오의 흔적을 묻은 나무를 함께 보러 걸어가 주었다. 그게 원만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그즈음 나는 변함없이 돌아오는 것들이나 곱게 물들어도 곧 사라질 것들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아, 앵오와 함께한 계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의 고양이는 나와 다르게 더위를 많이 탔다. 봄의 끝에 머무르는 온도에 나는 미처 더위를 느끼지도 못할 때 마저도, 앵오는 베란다로 나가 서늘한 타일 조각 위로 몸을 눕혔다. 일찍이 열 여덟 해의 여름을 살아오며 빨래 널이의 금속 부분에 머리를 기대면 더욱 시원하다는 것도 터득했다. 그러니 늦가을서부터 초여름 직전까지도 전기매트를 켜고 뜨끈하게 잠드는 내가 많이도 갑갑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위를 타는 집사에게 차마 뭐라 말은 못 한 채, 내 옆에서 잠들다 더워올 때면 홀로 서늘한 구석 바닥을 찾아 눈을 붙이곤 했다.
나의 늙은 고양이는 계절을 세는 법을 알려주었다. 무엇이든 무한해 보이는것도 계절로 세기 시작하면 유한해 진다는 걸. 그래서 추위가 무서워 미워만 하던 겨울이 돌아오는 게 소중해져, 자주 우리가 함께한, 그리고 함께할 겨울을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어가며 세어보게 만들었다.
앵오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집의 내 방에는 삼익 피아노 뒤로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방충망을 치고 창문을 열면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그곳은 앵오의 단골 낮잠 자리였다.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에서, 내가 피아노를 치거나 벌러덩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나의 고양이가 만개한 벚나무를 눈여겨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몇 평 안 되는 방이 우리가 나누는 세계의 전부였지만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여실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내가 벚꽃을 보고 눈물이 난 것은, 우연한 게 아니란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