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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Jul 18. 2021

싱가포르 칠리크랩 따라잡기

집콕을 버티게 해주는 '먹는 즐거움'

여름 무더위에 코로나19 거리두기 4단계 까지,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집콕밖에 없는 요즘이다. 끽해야 동네 공원 산책 정도이고, 외출도 외식도 조심스러운 시기인지라 우리 집 주방은 주말에도 삼시세끼 집밥으로 풀가동 중이다. 아이고 내 신세야~


그나마 집콕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먹는 즐거움! (이래서 다이어트는 늘 다음으로 미루곤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매번 먹는 익숙한 음식 말고 조금 색다른 음식으로 변화를 줘야겠다 싶었다. 그래야 나도 도전 과제가 생겨 무료함을 달랠 수 있고, 또 독특한 음식을 맛보며 가족들도 신나 할 테니까.


일단 집에 있는 재료들을 빠르게 스캔해본다. 저렴할 때 잔뜩 쟁여둔 아보카도와 잘 익은 토마토가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뭐다? 바로 과카몰리 당첨!


아침부터 만들기는 아무래도 버거울 것 같아서 전날 밤에 미리 만들어 놓았다. 냉장고에 차게 두어야 더 맛있기도 해서이다. 아보카도와 토마토는 후숙이 생명이다. 잘 익었다면 이미 게임 끝, 맛 보장!


과카몰리에는 소금, 후추, 아가베시럽 그리고 레몬 그리고 엑스트라버진올리브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택사항이지만 매콤한 할라피뇨를 송송 썰어 넣어주면 훨씬 맛이 업그레이드된다. 초딩은 아직 그 맛을 모르기에, 할라피뇨 유무에 따라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했다.

야밤에 과카몰리 만들기, 친절하게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


한 때는 가열차게 빵을 구웠지만, 요새는 날이 더워서 잠시 오븐 휴업 상태이다. 인근 빵집에서 아이들은 쌀식빵, 어른들은 우리밀식빵을 사 왔다. 그랬더니 아침밥상 준비가 훨씬 수월하다. '역시 사 먹는 빵이 최고'라는 진리를 다시금 체감한다.


당근라페는 며칠 전에 넉넉하게 잔뜩 만들어 놓은 건데, 아삭아삭한 식감과 홀그레인 머스터의 톡톡 튀는 쌉쌀함이 아주 잘 어울린다. 여기에 고수까지 추가하니 정말 환상의 맛! 주말이라 특별히 시간 여유가 있어 망고주스도 만들어봤다. 노란 빛깔이 벌써 식욕을 자극한다.

조식 나왔습니다! 과카몰리부터 당근라페까지


참고로 사진이나 글을 보고 내가 요리를 꽤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남들보다 먹는 것을 좀 더 사랑할 뿐이고, 애 둘 키우는 처지이다 보니 요리 실력이 아무래도 자연스레 늘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정도? 여전히 어이없는 실수도 많이 하고, 뭘 빠뜨리고 요리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날 아침에도 급하게 딸기바나나주스를 만들다가 사건이 발생했다. 믹서기 칼날을 제대로 맞물리게 잠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관계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얼음과 딸기, 바나나, 두유를 넣고 신나게 갈아준 후 손잡이를 돌려 본체에서 분리하는 순간 딸기바나나주스 대 폭발! 무슨 화산 용암 분출이라도 것 마냥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망연자실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아이들도 얼어버렸다. 오히려 괜찮다며 엄마를 위로해주는 아이들! 그래도 다행히 냉동실에 망고가 있었기에, 후딱 뒷수습을 끝내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음료를 준비했다. 그래도 믹서기가 고장 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긴 했지만, 이참에 하나 새로 사야 하나 싶은 욕구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결론은 '그래도 일단 버텨보자.'   

딸기바나나주스 폭발 사건으로 인한, 꿩대신 닭, <망고주스>


까다로운 둘째 아이는 과카몰리는 딱 질색이랜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관적으로 싫다고 하니 강요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다. 이 맛있는 걸 안 먹다니! 아무튼 이 녀석의 컴플레인을 사전 방지하고자 살구잼과 바질페스토를 바른 샌드위치로 준비했다.

철저한 고객만족! 고객님 입맛에 맞춰드립니다


가만 보니 이거 완전 국적불명의 식탁이다. 과카몰리는 멕시코 음식, 당근라페는 프랑스음식, 고수와 망고는 주로 동남아 음식에 등장하는데 말이다. 다국적 음식이 총집합한 대 화합이 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여기는 어느 나라인가요?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다. 오늘도 아이들은 외친다. "엄마 더 없어? 배고파" 다시 만들어주기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옛다 시리얼 먹어라! 넉넉하게 아침메뉴를 준비하지 못한 엄마의 불찰인 걸로 하자.

남들은 이게 아침식사일 텐데, 우리 집에는 시리얼이 후식이라니!



누굴 만날 수도 없고, 어딜 맘 편히 나갈 수도 없고 아무래도 집콕만 하기에는 너무 좀이 쑤시다. 날씨가 더 더워지기 전에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오기로 했다. 그냥 나가려 했더니 아이들이 오랜만에 쓰레기 줍기를 하자고 한다. 사실 나는 좀 귀찮은데....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외면할 자신이 없다.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챙겨 주변 정화활동을 한다.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아이고 기특해라", "너무 착한 아이들이네"라고 칭찬받는 게 꽤나 좋은가보다.


어쨌거나 이렇게 스스로 쓰레기를 줍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아이들이 어른보다 훨씬 낫구나 싶다. 걷다 보니 꽤 먼 거리까지 가게 되었다. 집에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물려줬더니 아이들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야말로 자나 깨나 고객만족.

동네 한바퀴 돌고 오니 오전 시간이 후딱~



금세 점심시간이다. 이거야 말로 밥돌밥돌(밥 먹고 돌아서면 또 밥이라는 뜻). 산책 후 돌아오는 길에 편하게 외식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꾹 참고 집으로 왔다. 점심은 바로 백순대볶음. 쓰리이가 좋아하는 순대를 조심스레 꺼내 든다. 야채들을 다듬는 동안 순대는 전자레인지에 돌려준다.  


모양이 좀 예쁘면 좋으련만, 배고파서 집중력이 흐뜨려졌나보다. 아무튼 순대와 야채를 함께 볶아준다. 순대볶음은 은근히 야채를 골고루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냉장고의 야채 자투리도 대량으로 처분 가능하다는 것은 덤이고.


아이들도 같이 먹을 수 있도록 고추나 고춧가루 등 매운맛은 빼고 백순대볶음으로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취향에 맞게 소스를 곁들인다. 어쨌거나 맛의 킬링 포인트는 바로 들깻가루! 아낌없이 팍팍 넣어주어야 순대 볶음의 맛이 살아난다. 소스는 고추장과 다진 마늘, 들깻가루, 들기름을 섞어서 만든 건데 쿡 찍어 먹으면 금상첨화. 아이들은 쌈장에 들깻가루, 들기름을 섞는 정도로 덜 맵게 만들어주면 잘 먹는다.

오늘의 점심메뉴, 백순대볶음


하긴 2시간을 넘게 걷고 왔으니 무얼 먹어도 다 맛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날 따라 순대볶음이 입에 착 붙었다. 넉넉하게 만들어 둔 소스도 금세 매진 행렬. 들기름과 들깻가루로 온통 입 안에 고소함이 맴돌았다.



대망의 저녁 메뉴는, 바로 칠리크랩이다. 싱가포르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먹어보게 되는 바로 그 유명한 칠리크랩! 사실 전에는 집에서 만들 생각은 꿈도 못 꿔봤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살다 온 지인의 말로 "시판 소스만 있으면 라면 끓이는 것만큼 쉽다니까!"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실제 만들어보니 그 정도의 난이도 하 요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긴장한 것보다는 또 쉬웠다)


과연 현지의 맛을 조금이라도 재연할 수 있으려나 반신 반의 하면서. 야심 차게 칠리크랩 소스를 구매하는 것으로 요리는 시작되었다. 오리지널 버전처럼 제대로 먹으려면 킹크랩을 사서 손질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실질적인 이유로 손질 절단 꽃게를 샀다. 어차피 나는 야매요리파니까.


비주얼과 맛은 좀 떨어지겠지만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백 배 잘 한 선택이었다. 여기에 고수와 계란, 코코넛오일,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새우까지 준비하면 일단 칠리크랩 요리의 준비는 끝.  

싱가포르의 칠리크랩 반만 흉내 내 보는 게 오늘의 목표


칠리크랩을 먹으면 빵(번)이나 밥을 선택할 수 있다. 현지에서도 늘 고민되는 선택이었기에(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묻는 기분) 나의 선택은 "둘 다!"였다. 모닝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 팬에 구워주고, 밥은 마늘과 파 그리고 계란스크램블을 넣어 볶아주었다. 여기에 커리파우더와 굴소스는 감칠맛을 더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재료! 바로 빠지면 절대 안 되는 고수. 확실히 고수를 얹는 순간 비주얼이 살아났다. 맛은 당연지사.

오늘의 주인공, 식탁 위의 꽃 <칠리크랩>


아이들도 같이 먹으면 좋으련만 아직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초딩들이기에 대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평소에 먹고 싶다고 주문했었던 음식 베이비립을 대령했다. 아이들도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야 칠리크랩을 못 먹는다고 입이 삐쭉 나오는 사태를 면할 수 있기에, 일종의 상생 전략이랄까.


등갈비를 사서 직접 만들어 줄라다가, 오늘은 칠리크랩에 집중해야 하니 참았다. 그냥 소스까지 다 입혀져 있는 반조리 식품으로 샀다. 아니 마침 온라인 쇼핑몰에서 20% 할인 판매도 하니 이건 뭐 안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주문하신 베이비립 나왔습니다(라고 쓰고 "칠리크랩은 우리 꺼야"라고 읽음)


밥과 빵 둘 다 준비되어 있으니 아주 흐뭇하다. 꽃빵을 튀기면 더 맛있다고 하지만, 모닝빵이 좀 더 준비하기 수월할 것 같아 이걸로 선택했다. 죄다 기름진 음식인 것 같아서 뭔가 중화시켜줄 만한 게 필요했다. 그래서 준비한 샐러드.

볶음밥과 빵, 그리고 느끼함을 달래줄 상큼한 샐러드


바라만 봐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칠리크랩을 보면서 마음이 벅차오른다. '야무지게 싹 먹어주겠어!' 결의를 다지며 전투적으로 식사에 돌입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과 나와 은근히 경쟁구도다. 빨리 먹어야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양보 따윈 없는 그런 현실부부.


예전에 싱가포르에 여행을 다녀왔던 추억이 떠오르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클락키에서 솔솔 부는 바람을 맞으며, 야외 테이블에서 먹었었던 그 칠리크랩. 비록 금액은 사악했지만, 그때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걸 우리가 집에서 먹게 될 줄이야. 물론 맛도 비주얼도 한참 딸리지만,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로 감개무량하다.


신난 우리 부부와는 달리, 아이들은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본다. 아차차, 너희들과는 같이 못 갔었지! 그래서 칠리크랩의 감흥이 없겠구나. 나중에 코로나19가 종식되면 할 일이 생겼다. 바로 아이들과 함께 싱가포르 여행 가기!


한 입 도전해 봤다가 맵다고 바로 포기한 아들을 보며(둘째는 겁이 나는지 아예 시도도 못함) 다음에는 푸빳퐁커리를 만들어봐야겠다 싶다. 코코넛밀크에 커리가 들어간 거라 그건 칠리크랩처럼 맵지는 않으니 다 같이 먹을 수 있겠지? 이렇게 또 다음 미션이 생겼다.


레시피대로라면 피넛오일을 넣고 게를 튀기라고 하는데, 집에 피넛 오일이 있을 리가!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용량과 가격 대비 합리적이지 않아 선뜻 구매할 수 없었다. 집에 있는 아무 오일이나 해야겠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베이킹에 종종 쓰는 코코넛오일이 떠올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냥 현미유나 포도씨유보다 코코넛오일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던 듯하다. 향도 그랬고, 맛이 뭔가 풍성해진 기분이랄까.



이렇게 배불리 먹고도 후식을 찾는, 자비라고는 1도 없는 녀석들. 달래 보아도 소용없다. 빨리 후식 내놓으라고 난리도 아니다. 부랴부랴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고 복숭아를 대령한다. 잘 먹어서 고마운데 안 고마운 이노무자슥들.


쓰리이는 이렇게 그릇에 나눠주고 나는 앙상한 갈비를 뜯는 신세다. 왜 엄마들이 과일도 제대로 못 드시고, 설거지하며 서서 대충 남은 걸 드시는지 예전에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내가 딱 그 모습이다. 이렇게 나도 엄마가 그리고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내 몸 하나 챙기기 급급했던 이기적이었던 나도 자식들과 남편 챙기느라 나는 뒷전이 되기 십상이라니, 그저 신기하다.


거창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처음 만들어보는 칠리크랩 때문인지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나마 먹는 즐거움으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 오늘도 미션 컴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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