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인 두 녀석의 개교기념일이 다가왔다. 이 좋은 가을날, 평일 찬스를 어떻게 하면 100% 활용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보다가 캠핑 당첨! 나를 쏙 닮아서 유독 먹성이 좋은 첫째, 그리고 지치지 않고 놀고 또 노는 무한체력의 둘째(노는 게 그렇게도 좋더냐? 니가 무슨 뽀로로도 아니고...) 이 둘의 요구사항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게 바로 캠핑이었다. 자연을 즐기며 실컷 먹고 원 없이 놀면 되니까.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은 평소에는 거의 예약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인기가 많다. 하지만 평일, 그것도 월요일이었기에 텅텅 비어있는 예약 현황을 보며 회심의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캠핑장 예약은 손쉽게 완료. 캠핑의 컨디션을 좌우하는 날씨도 체크해 보니 다행히 비 소식은 없다. 비록 당일에는 미세먼지가 살짝 나쁘긴 했지만, 비 안 오는 게 어디냐며 위안을 삼았다.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나 적극적인 남편은 회사에서 대 혼란의 시기임에도 미친 척 과감히 연차를 냈다. 어떻게 보면 남편이 합류해 줬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아무리 애들이 많이 컸어도 둘 데리고 캠핑은 아직은 역부족이니까. 하여튼 온 가족이 노는데 진심이다. 이래서 우리 집 가훈은,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자.>라는 사실.
이제 남은 건? 바로 캠핑의 꽃, 먹는 시간을 빛내줄 메뉴를 정하는 일이다. 캠핑하면 바비큐는 국룰이라 일단 저녁에는 고민의 여지없이 삼겹살과 목살을 먹기로 했다. 고기는 늘 옳으니까. 물론 소시지를 곁들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점심이 참 애매했다. 2시부터 입장이 가능한데, 그렇다고 집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에는 번거롭고 캠핑장 근처 식당에서 사 먹자니 영 내키지 않았다. 고민 끝에 캠핑장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 들러서 잠시 여유도 부려보고,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먹기로 했다. 그리고 캠핑장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최대한 간편하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메뉴로 정하기로 했다.
마침 냉동실에 곱게 쟁여둔 떡볶이가 퍼뜩 생각났다. '아, 이때를 위함이구나!' 택배로 주문해서 먹은 떡볶이인데, 마지막 남은 1팩을 좀 더 의미 있게 먹으려고 아껴둔 것이다. 벌써부터 피식 웃음이 나는 걸 보니, 나는 어쩔 수 없는 떡볶이예찬론가이구나. 떡볶이는 2인분이었기에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이들을 위해 부산 물떡과 꼬치어묵을 로캣배송으로 주문했다. 떡이고 어묵이고 꼬치에 끼워져 있기에 냄비에 넣고 물만 넣고 끓이는 거라 세상 간단하다. 떡볶이도 역시나 동봉된 소스와 어묵만 넣고 끓이면 되니, 10분이면 뚝딱 준비해서 바로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이번 캠핑은 꾸역꾸역 하기 싫은 숙제처럼 준비했음을 고백한다. 쓰리이는 몸만 가면 되지만, 나는 미리 장도 봐야 하고 짐도 싸야 하고, 다녀와서 정리도 결국 다 내 몫이니까. 물론 현장에서 먹는 즐거움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준비 과정도 인내할만 하지만 요새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고객만족을 위해서 이 한 몸 희생하는 수밖에. 대신 최애 음식인 떡볶이와 고기 타임으로 노고를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야무진 다짐을 했다.
이전에도 캠핑을 3~4번 정도 다녀왔다. 모두 서울 혹은 서울 근교 당일치기 캠핑. 미니멀라이프를 고수하는 덕에 캠핑 용품도 별로 없거니와, '잠은 집에서'가 철칙이기 때문이다. 굳이 편안한 내 집 놔두고 불편한 데서 잠까지 잘 생각은 없다. 즉 결론적으로 오로지 먹고 놀러 가는 캠핑이라는 뜻이다.
어쨌거나 계획대로 떡볶이의 준비는 순조로웠다. 매점에서 대여한 트윈버너가 이리도 요긴할 줄이야!동시에 한쪽에는 떡볶이를, 다른 한쪽에는 물떡과 꼬치어묵을 사이좋게 준비했다. 가족들 모두 대만족 하는 성공적인 점심메뉴였다. 따끈한 국물에 쫄깃하고 매콤한 떡볶이가 배에 들어가니 한결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그래, 이 맛이 캠핑을 오는 거지!"
이왕이면 좀 더 극적인 감동을 얻고 싶은 마음에 레트로한 멜라민 그릇도 챙겨갔다. 나의 엉뚱하고도 철저한 준비성에 남편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싶은 어이없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뭘 먹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먹느냐도 중요하니까 멜라민 그릇의 활약은 아주 훌륭했다. 야외에서는 뭘 먹어도 다 맛있긴 하지만 떡볶이는 역시나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배드민턴에, 공놀이에 신나게 뛰놀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까지, 아 모든 게 완벽하다 싶었다. 이렇게 해피 엔딩이면 좋으련만, 꼭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기 마련. 고대하던 바비큐는 대 실패로 끝나버렸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유인즉슨, 소화도 시킬 겸(고기를 제대로 먹겠다는 큰 그림) 천왕산 정산까지 올라갔다 왔는데 금세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서 캄캄한 환경에서 준비하는 바비큐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기대했던 바비큐 타임은 순탄할 리 없었다. 정상이라고 해봤자 올라가는데 15분 정도 소요되는 짧은 코스였지만 문제는 훌라후프도 돌리고, 사진도 찍고 하느라 시간이 예상보다 후딱 가버렸다는 것이다.
숯에 불을 붙이는 데도 한참 걸리고, 아무리 집에서 야채고 밑반찬이고 다 손질해 왔음에도 밥상을 차리는 일 곳곳에 손이 필요했다. 고기 굽기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는 이미 캄캄해진 상태. 그래도 조명등이 있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고기가 제대로 익었는지 영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길래 산책할 때 좀 더 일찍 출발했어야 하는데, 아니면 좀 더 빨리 내려왔어야지!" 아니, 뒤늦게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냐고. 남편과 투닥거리는 건 기본이요, 춥고 배가 아프다며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둘째까지....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었다.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한 채, 아이들 수발들며, 남편 눈치 보며, 화를 꾹 참아가며 먹는 고기의 맛은 최악이었다. 바비큐 때문에 캠핑에 온 이유가 절반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찬스를 날려버리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점심에 이어 저녁도 설거지를 하면서 '아니 내가 캠핑 준비도 다 했는데, 밖에 나와서까지 똑같이 설거지를 다 해야 해?'라는 생각에 짜증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참을 뒤틀린 심보는 뭐든 곱게 보이질 않았나보다. '어딜 가나 부엌데기의 삶은 여전하구나.'싶어 신세한탄이 나왔다.
'잠은 집에서'에 이어, 앞으로 '밥도 집에서'가 확고하게 결심이 서는 순간이었다. "에랏, 쓰리이와는 오늘이 마지막 캠핑이다! 난 다시는 안 올 거야." 이렇게확 질러버리고 나니 아이들은 거의 얼음 상태가 되었다.
"진짜야, 이제 캠핑 따위는 없어!" 화가 난 나의 모습을 보며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그래도 아까 떡볶이는 괜찮았잖아요." 이에 질세라 둘째 아이도 거들었다. "캠핑장에서 떡볶이 먹는 엄마 모습이 엄청 행복했었는데, 기억 안 나요?"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그래, 이번 캠핑의 수확이 없지는 않았구나. 비록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감정이었는데, 뭐 이리도 금방 감정이 요동친걸까. 기껏 바비큐를 기대한 것처럼 맛있게 못 먹었다고 말이다. 아이들 앞에서 급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고기는 망했어도 그래도 떡볶이의 추억이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결국은 이렇게 캠핑중단 선언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은 채로 바비큐를 먹을 생각에 또 주섬주섬 캠핑 준비를 하고 있겠구나 싶다. 아 그때도 떡볶이를 챙겨서 와야 되나? 아니, 나 이제 캠핑 안 갈 건데 어쩌지? 자아분열이 되는듯한 이 상태는 대체 뭔지?
이 날 만약에 떡볶이가 맛이 없었다면 캠핑은 완전히 접었을 텐데, 왜 하필 또 끝내주게 맛있었을까. 결국 떡볶이가 잘못한 걸로 해야겠다. 11월 중순 이후, 그러니까 좀 더 가을의 중심에 있었더라면 빨간 단풍을 보며 먹는 떡볶이는 더 감동이 컸을 텐데. 아마 자동으로 "빨강은 아름다워"를 외치지 않을까? 안 되겠다, 할 수 없이 다음 캠핑을 기약해 봐야겠다. 마지막이 될 뻔한 캠핑은 떡볶이 덕분에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집에서 만큼은 떡볶이는 '평화의 상징'으로 승격시켜야겠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음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