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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Nov 24. 2023

소박하지만 특별했던, 아들과 떡볶이 데이트

"우리 단 둘이 떡볶이 먹으러 갈까?"

첫째인 아들은 수다 떨기와 맛있는 음식 먹기를 좋아한다. 반면 둘째인 딸은 오로지 축구 생각뿐이고 축구선수가 꿈인 아이다. 남들은 아들 키우기가 더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정 반대다. 본인의 물건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쪽도, 물건을 험하게 다루는 쪽도 늘 딸내미이다. 우산 망가뜨리기, 안경테 부러뜨리기, 지갑 분실, 바지 찢어지기, 운동화에 구멍내기 등 사고 치는 분야도 참 다양하다. 혈압이 오르락내리락할 때가 한두 번 아니다.  


'아들은 이래야 하고, 딸은 이래야 해'라는 사회적인 고정관념이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안 통한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꼭 지킬 필요도 없는 일이니 굳이 바꾸려 애쓰지도 않는다. 타고난 기질대로 존중해 줄 뿐. 하여튼 남매를 키우다 보면 각각의 성향을 발견할 때마다 참 신기하다. 분명 같은 공장 출신인데 어쩜 이리도 성격도, 취향도, 하는 짓도 다 다를까?




구에서 운영하는 여학생축구교실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참여하는 딸은 수업 시간만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이 날을 기다리는 것은 단지 이 녀석뿐만이 아니다.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본인이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들 녀석 또한 같은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었다. (물론 사춘기가 살짝 올랑말랑 하지만, 그래도 엄마 바라기인걸 보면 아직까지는 순수한 면이 있다.) 그래서 그때마다 같이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시장도 다녀오는 등 주어진 1시간 30분의 시간을 다양하고 알뜰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축구교실 종강일. 정작 축구를 다니는 딸보다 아들이 더 시무룩하다. 이 말인즉슨 나와 아들의 데이트도 끝나는 날이라는 뜻이기에. "엄마, 우리 특별한 계획을 한번 세워봐요! 마지막 데이트를 기념해야죠." 라며 제법 진지한 제안을 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럼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까?" 


고백컨데, 전적으로 내 욕심이 들어간 제안이었다. 혹시 거절한다 하더라도 할 말은 없겠지만, 성공 확률은 반반일 테니 용기 내서 일단 한번 던져보았다. 아들과 단 둘이 '떡볶이 데이트'는 내 버리스트 중에 하나였으니까. 의외로 첫째 아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오케이를 해줬다! 할렐루야.


너무 쉽게 승낙을 받은 터라 어안이 벙벙했다. 곰곰이 이유를 따져봤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라서?

-동생 없이 엄마랑 단 둘이 오붓하게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기회라서?

-흔치 않은 평일 저녁 외식이라서?

-어른답게 매운 음식에 도전하는 자신의 모습이 기특해서?


아무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아들과의 떡볶이 데이트 성사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막상 본인만 엄마와 좋은 시간을 누리려니 양심에 찔렸는지 아들 녀석은 동생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첫째 아이도 안심시킬 겸 둘째 아이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혹시 서운해하는 건 아닌지 눈치도 살폈다. 가만히 상황 설명을 듣던 딸, "괜찮아요. 어차피 나 매운 거 잘 못 먹으니까. 그리고 나는 축구가 더 좋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과는 달리 쿨하게 우리의 데이트를 용납해 주었다.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뭔가 합법적인 데이트가 된 듯한 기분인지, 아들 녀석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호기롭게 떡볶이 데이트를 제안했지만 '막상 먹어보고 맵다고 실망하는 거 아닌가?' 싶어 잠시 주춤했다. 작년 에는 불닭볶음면을 시도해봤다가 제대로 패했고 지난 여름만해도 마라탕을, 그것도 꼴랑 1단계를 도전했음에도 폭망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물 콧물은 다 쏟으며 다시는 이 마라탕 따위는 먹지 않겠다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다행인지 아들은 요새 부쩍 매운 음식에 관심을 보이긴했다. 일종의 도전과제에 임한다고 해석해야 하나?


마치 '매운 음식'이 마치 '어른의 상징'이라고 되는 듯, 반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매운 음식을 잘 먹느냐의 여부가 으스댈 수 있는 척도로 통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일단 어디로 가야 할지부터 정해는 게 우선이었다. 고민 끝에 집과 가까운 네 곳을 후보지로 정해서 아들에게 브리핑했다.

 

후보 1. 흑석동의 즉석떡볶이집

직접 끓여서 먹으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볶음밥까지 먹으려면 더더욱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제대로 즐기기에 아무래도 시간적으로 쪼들릴 것 같아서 탈락.


후보 2. 노량진의 포장마차

그래도 명색이 데이트인데, 포장마차는 좀 실망스러운 눈치다. 양 많고 저렴하다는 장점을 뒤로한 채 탈락.

 

후보 3. 노량진의 분식집 1

떡볶이 말고도 튀김, 순대, 어묵까지 전체적으로 다 먹을 수 있는 곳. 특히 어묵이 단돈 500원 밖에 안 하는 미친 가성비를 보유한 곳이다. 어묵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동생과 함께 나중에 같이 오기로 약속하며 아쉽게도 탈락.


후보 4. 노량진의 분식집 2

맵기 단계 조절이 가능하고, 다양한 사이드 메뉴가 있는 곳. 그래서 이곳으로 결정!




빛의 속도로 축구교실이 진행되는 동네 공원의 풋살장에 딸아이를 데려다 주었다. 바그 길로 쏜살같이 아들 녀석과 함께 목적지로 향했다. 가는 내내 얼마나 조잘조잘거리던지! 나랑 데이트가 그렇게도 좋더냐? 그렇게 한 10여분을 걸어서 위풍당당하게 분식집에 입장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비율의 여자 손님들을 보더니 아들은 급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 키도 일찌감치 훌쩍 뛰어넘은 산만한 녀석이 순간 한 없이 작게 느껴졌다.


"원래 교회 오빠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해!" 라며 잔뜩 움츠러든 아들을 다독였다. 다행히도 몇 명의 남자 손님이 더 들어왔고 그제야 아들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고민의 여지없이 매운맛은 1단계로 선택했다. 단품으로 고르려다가 푸짐하게 제대로 먹어야 기억에 남을 거 같아서 2인 세트로 주문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주문했던 음식들이 한가득 테이블로 배달되었다. "와~" 하고 탄성을 지르는 녀석. 과연 오늘 떡볶이 먹방 성적은 어떠려나?

 

인증샷을 찍기가 무섭게 공격적인 포크질이 시작되었다. 조심스럽게 떡볶이를 입에 넣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호들갑이다. 맛이 긍정적이라는 신호다. 특유의 단짠단짠 맛이 꽤나 취향을 저격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만한 게 톡톡 씹히는 옥수수 토핑에, 아낌없이 들어간 트리플 치즈는 떡볶이의 맛을 끌어올려주기에 충분했다. 평소에 집에서 먹는 떡볶이와 달리 짜릿하고 입에 착착 붙는 양념 맛을 음미하더니, 진지하게 내리는 평가,


 "이게 바로 MZ들의 입맛인 건가요?"


아들의 반응에 나는 그만 소리 내서 깔깔 웃었다. 12살 아이의 평가는 제법 정확했다. 이게 바로 요새 MZ세대들이 좋아하는 떡볶이의 맛이라고, 떡볶이가 이렇게도 멋지게 변신할 수 있다며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기존에 먹었던 떡볶이는 수수한 맛이었기에, 이 날 먹은 떡볶이는 나름 임팩트가 있었을 터.


먹을수록 슬슬 올라오는 매운맛과 얼얼함에 포기할 법도 했는데, 그래도 극복할만했나 보다.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금세 바닥을 보였으니까. 물론 세트 메뉴에 포함된 감자튀김과 주먹밥, 그리고 시원한 탄산음료의 공이 크기도 했지만 말이다. "엄마, 나 완전 많이 컸죠? 떡볶이 하나도 안 매운데요?" 라며 한껏 어깨를 으쓱이는 아들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떡볶이 완주가 가능했던 건 다 너희들 덕분이다!


단돈 1.5만 원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대 만족감을 보이는 아들 녀석 덕분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래, 앞으로도 이런 건전한 일탈은 얼마든지 허용해 주지! 주말은 아니지만, 주중에는 평소 죽어라 집밥을 고수하는 덕에 이렇게 바깥에서 간편하게 저녁밥을 해결하니 나 또한 제대로 일탈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들과 둘이서 말이다.


11월에 있던 일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며, 어제보다 행복지수가 5%는 올라간 것 같다며, 이게 바로 소소한 행복 아니겠냐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아들 녀석을 보니 오늘의 떡볶이 데이트는 성공한 게 틀림없다.


앞으로도 우리 싸우지 말고 잘 지내보자고,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오래된 13년의 찐한 사이를 잘 유지해 보자며(뱃속에서 1년 + 태어나서 12년 = 도합 13년)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한편 딸내미에게 괜히 미안한 생각에 편의점에 들렸다. 그래봤자 풍선껌 하나 챙긴거지만 딸의 최애 아이템이다. 아무리 사전에 허락을 받아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걸 보니 나도 별 수 없는 엄마인가 보다. 축구 교실이 끝나자마자 짜잔~ 하고 풍선껌을 내밀었더니 딸은 역시나 함박웃음으로 화답했다. 그제야 나도 덩달아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지나면 아들 녀석은 내가 아닌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러 올게 뻔하다. 그리고 곧 본격적인 사춘기에 접어들면 아무리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설득해도 귀찮다고 칼 거절할 확률이 매우 높을 테지. 그래도 아직까지는 엄마를 따라 나와 주니, 이 사실만으로도 참 고마울 뿐이다.


그러고 보니 떡볶이집에서 생맥주도 판매하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언젠가는 술도 같이 마시는 날도 곧 오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슬쩍 웃음이 난다. (문제는 내가 맥주를 평소에 안 마신다는 게.... 알쓰라 미안하다.)



'도대체 언제 애들 다 키워놓고 실컷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나?' 라며 자녀들이 독립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웬걸, 오히려 아쉽기도 하고 서운한 이 감정은 뭔지. 마냥 엄마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 같았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훌쩍 자랐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의 이 순간순간을 온전히 감사하며 누려야겠다. 아무튼 부디 사춘기여 천천히 와 주길! 아니, 사춘기가 오더라도 최소한 떡볶이 먹을 때는 잠시 휴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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