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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Oct 27. 2023

부산까지 가서 웬 떡볶이 타령?

어쩌다 시작된 1일 1떡볶이 도전 미션

더위에 꼼짝도 하기 싫었던 지난여름, 유독 어디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에어컨 빵빵 튼 내 집이 최고라며 휴가고 뭐고 무기한 미뤘다. 날씨가 좀 시원해지거든, 그때 생각해 보자며 말이다. 거의 매년 고민의 여지도 없이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는 우리 가족,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이 반대다.


"엄마, 내 친구들이 뭐래는 줄 알아요? 혹시 엄마가 강릉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냐며, 왜 그렇게 맨날 강릉만 가냐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딴 데 가봐요!"


아이고, 내가 졌다! 요새 초딩들 대화 수준은 참 예측 불허이다. 아무튼 자차로 하는 강릉 여행 말고, 비행기를 타든 KTX를 타든 색다른 곳을 가보자며 성화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그래, 이번에는 부산이다! 세련미 뽐내는 고층 빌딩도 구경하고, 멋진 해변도 원 없이 산책하고, 야경도 실컷 즐기고 오리라.


하지만 누가 뭐래도 여행의 백미는, '맛집 투어'이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먹거리를 찾아다니며 맛보는 그 쏠쏠한 재미란! 물론 관광지를 부지런히 방문해야 하는 것이 여행의 본질임은 맞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마주할 때 큰 감동을 느끼듯, 특산 음식 앞에서의 감흥도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마치 부산의 떡볶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백컨데, 나란 여자는 여행 동선을 짤 때 먼저 맛집의 위치를 파악해서 우선적으로 배치하고 그다음으로 주변 관광지를 껴 넣는 식이다. 그만큼 여행에서 먹는 즐거움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이번 부산 여행에서 부산의 대표음식 명물인 돼지국밥, 밀면, 유부주머니 등의 맛집은 물론 각종 유명 간식거리도 섭렵한 것은 당연한 소리.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떡볶이 맛집까지도 도전하게 되었다.


나도 남편도 둘 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타 지역의 떡볶이를 먹어본 경험이 별로 없다. 그래서일까? 떡볶이는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산만큼은 달랐다. 일단 부산은 지역 특성상 해산물이 많이 잡힌다. 식재료 수급이 수월해서인지, 가공 산업이 발달해서인지, 아님 둘 다 해당되는지 부산은 어묵이 유명하다. 떡볶이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어묵의 본 고장은 맛은 특별할 수밖에. 게다가 쌀로 만든 두툼한 가래떡을 사용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여기에 맵단짠(맵고 달고 짠맛)이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사실.


부산 떡볶이의 첫인상은, 새빨간 비주얼에 흠칫 놀랄 정도였다. 마치 끓어오르는 지옥불 같다고 해야 하나?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매워 보여서 '이걸 먹어 말아'하고 고민이 될 정도였다. 먹어보기도 전에 속이 쓰린 건 아닐까, 매워서 배탈이 나는 건 아닐까 등등 분명 자극적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상황은 대반전. 기분 좋을 만큼의 적당한 매운맛이었다. 괜히 겁 낼 필요 없었구나 싶다. 어떻게 보면 부산 사람들과도 닮은 것 같았다. 언듯 들으면 마치 싸우는 듯 센 억양과 친절과는 거리가 먼 투박한 말투였지만, 알고 보면 세상 따뜻하고 정이 많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부산의 3대 떡볶이 맛집 정복>과 같이 야심 찬 계획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간식으로, 야식으로 떡볶이를 연속으로 먹게 되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부산여행 3박 4일 동안 1일 1떡볶이를 도전해 보면 어떨까? 하고 얼떨결게 떡볶이 맛집 탐방이 시작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션 수행 결과는 절반만 성공했다.


'부산 3대 떡볶이'라 불리는 상국이네, 이가네, 다리집 중 이가네는 결국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 날 부산을 떠나기 전 부산역의 남천할매떡볶이를 찾아 헤매다가 기차 시간이 아슬아슬해서 결국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1일 1떡볶이 미션이라도 완성했어야 하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다녀간 세 곳의 떡볶이 맛집의 황홀했던 기억이 있기에 결코 실패한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맛보지 못한 독특한 경험이었으니,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는 있었다.




1. 깡통골목할매 유부전골 본점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부평깡통시장으로 향했다.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아이들 때문에. 아무튼 부산의 대표 먹거리 이면서 애들도 어른들도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간식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간 곳. 유부보따리가 궁금하다며 냉큼 유부전골을 주문한 첫째, 그리고 우동이라면 만사 오케이인 둘째는 유부 보따리 우동을 주문했다. 나는 당연히 유부 떡볶이. 사실 유부보따리가 더 주인공이라 아무래도 떢볶이의 선호도는 밀릴 수밖에 없다. 별 기대 없이 먹어서일까, 맛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부산 떡볶이는 확실히 다른데? 완전 맛있어!"


떡볶이 전문가인 엄마의 후한 평가에 자기들도 먹어보겠다며 좁은 그릇에 젓가락이 분주해진다. 아, 오롯이 나 홀로 한 그릇 먹고 싶었는데, 그냥 조용히 있을걸. 다행히도 맵찔이인 초딩들 입맛에는 조금 매운가 보다. 한두 개 먹어 보더니 물러가주었다. 나이쓰. 아무튼 밀가루가 아닌 쌀떡이고, 단백질을 챙길 수 있는 유부가 들어가서 괜히 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첫 떡볶이를, 소위 말하는 떡볶이 3대 맛집도 아닌, 떡볶이 전문점도 아닌 유부전골 집에서 먹었음에도 상당한 임팩트를 느꼈다. 아 이건 운명이구나! 남은 부산 여행에서 다른 떡볶이집도 가보리라는 시발점이 되었다.  



2. 다리집 본점

광안리 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다리집. 이미 맛집 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나온 떡볶이 맛집으로, 4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이른바 떡볶이계의 '뼈대 있는 집안' 같은 곳이다. 저녁에 고기를 실컷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떡볶이는 포기할 수는 없었다. 후식배는 따로 있는 거니까. 평소에 야식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여행이니까 일종의 변주도 허용해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영업시간. 이러다 문 닫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다리집으로 향했다. 우리 가족의 주문을 끝으로 마감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다음 손님부터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마치 입시전쟁을 치르고 간절히 원하던 대학에 겨우 합격한 기분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리도 내적 댄스를 유발할 일인가? 부산에 왔으면 부산 우유와 부산 막걸리쯤은 먹어주는 게 예의 일 것 같아서 편의점에 들러 음료도 챙겼다. 한 달에 한두 번 와인 반 잔이 주량인 나로서는 참 여러모로 일탈의 날이다.


어묵은 아이들의 차지, 떡볶이는 어른들의 몫, 그리고 튀김은 공용이었다. 두툼한 오징어 튀김은 다리집의 시그니처로 통한다. 그러고 보니 '여행'과 '떡볶이'의 조합이라니, 나의 최애들만 모였구나. 이건 어떤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참 바람직하고 옳은 조합이다. 비록 매장에서가 아닌 포장해 온지 한참 지난 오징어 튀김이라 바삭바삭함이 덜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아쉬워하기에는 영업이 끝나기 전 아슬아슬 한 발 걸친 게 어디냐며, 배부른 투정 따위는 넣어두기로 했다.


역시나 입에 착 감기는 소스. 약간 넉넉한 국물 스타일이라 더 좋았다. 굵은 가래떡임에도 간이 적절하게 배어있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많이 못 먹을 줄 알고 4줄만 시켰던 나의 어리석은 판단을 자책했지만, 아쉽게 먹어서 더 감질맛이 났던 게 아닐까 싶다. 다음에는 매장에서 더 넉넉한 양의 떡볶이와 갓 튀긴 오징어 튀김을 먹으리라 다짐했다. 먹으면서 먹을 결심하는 나란 사람이란...


(비하인드 스토리를 덧붙이자면, 평소 안 먹던 막걸리를 그것도 꼴랑 반 잔밖에 안 마셨음에도 대가는 혹독했다. 목 주변 피부에 알레르기가 나서 며칠간 약을 먹으며 고생했다는 후문. 막걸리는 나랑 안 맞는다는 결론.)



3. 상국이네

부산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떡볶이 맛집은 바로 '상국이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산 떡볶이의 대명사 급으로 칭송받는 곳, 과연 그 비결이 뭘지 궁금했다. 역시나 대중에게 사랑받는 곳은 다 이유가 있었다. 맛도 맛이지만 빠르고 합리적인 주문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다섯 명도 넘는 직원들이 분주하고 일사불란하게 척척 움직이는 모습이 참으로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대기 시간이 길다고 소문난 곳이지만, 이 날은 운이 좋았는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주의사항에 적힌 대로 그릇을 들고 직접 튀김을 골라서 담았다. 포장을 원한다면 그릇이 아닌 종이 박스에 담는 시스템이었다. 각종 다양한 튀김이 1천밖에 안 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특히 고추튀김이나 새우튀김 같이 일반 튀김에 비해 단가가 높은 녀석들도 가격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잠시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참, 나 떡볶이 먹으러 왔지!' 얼른 이성을 차리고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히 골랐다.  


순대, 물떡, 어묵, 떡볶이, 튀김 이렇게 다양하게 주문을 하고 드디어 착석. 부산은 물떡이 있어서 어찌나 감사하던지! 맵찔이인 딸내미도 대 환영하는 눈치다. 애들은 물떡을, 어른들은 떡볶이를, 각각 취향별로 따로 또 같이 분식을 즐길 수 있는 참으로 바람직한 곳임에 틀림없다. 떡볶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왜 부산까지 와서 하필 떡볶이인데?"라며 툴툴대던 남편도 상국이네에서만큼은 "여긴 진짜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네. 떡볶이가 원래 이렇게 맛있던 음식이었던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가지 웃긴 건 객관적으로 봐도 튀김의 퀄리티도 상당히 괜찮았음에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떡볶이의 맛에 완전히 매료되어 오직 떡볶이님에게만 시선 고정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한참 뜨겁게 연애중일 때 내 남친만 컬러로 보이고 다른 남자들은 다 흑백으로 보이는 효과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쫀쫀한 쌀떡 특유의 식감은 두툼한 가래떡과 만나 그 감동이 몇 배는 더 증폭되는 듯했다. 어묵은 또 어떻던가? 가래떡보다도 훨씬 큼직한 어묵을 아낌없이 넣은 걸 보니 후한 인심이 느껴졌다. 최소 상국이네에서 만큼은 어묵은 떡볶이를 거들어주는 조연이 아닌, 가래떡과 함께 남주 여주 자리를 사이좋게 하나씩 꽤 찬 느낌이었다. 그만큼 존재감이 상당했다.


양념에는 간장과 더불어 웬 쌈장이 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순대에 찍어먹는 거란다. 부산에 왔으면 현지인처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따라 하는 게 국룰. 난생처음 맛보는 특별한 순대의 맛이었다. 떡볶이도 짠 편인데 순대도 짜게 먹다니!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또 막상 먹어보니 "이 조합 찬성일세."로 바로 태도 돌변. 어쨌거나 비로소 순대에 쌈장 찍어먹을 줄 아는 '배운 여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부산의 많고 많은 떡볶이 맛집 중에 겨우 세 군데만 다녀온 초라한 성적표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부산 떡볶이는 어딜 가나 하나 같이 다 맛있었다. 어묵이 맛있으니 더 떡볶이가 맛있던 건 당연한 일이고, 쨍한 빨간색 색감에서 주는 시각적 자극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리고 쌀떡이라 확실히 속이 편해서 좋았다. 그렇게 먹어도 속이 부대끼는 일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물떡이 있어서 애들에게 미안한 마음 없이 떡볶이 타임을 같이 즐길 수 있어서 더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것 같다. (얼른 커서 매운 떡볶이도 같이 먹는 날이 오기를!)


맵단짠 삼박자의 완벽 조화, 꾸덕한 국물, 쫀득한 쌀떡... 이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물엿이 주는 특유의 진득하고 자작한 양념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캡사이신으로 인공적으로 매운맛을 내는 떡볶이가 성형미인이라면, 부산의 떡볶이는 오버하지 않고 적당히 멋을 낸 꾸안꾸 같은 멋쟁이 느낌이었다. 대체로 간이 좀 세긴 했지만, 부산만의 개성 있는 떡볶이의 맛으로 존중한다면 충분히 수긍할만했다.


밀키트 혹은 떡볶이소스라도 사 왔더라면 덜 그리웠을 텐데, 왜 나는 용감 무식하게도 빈손으로 왔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남아야 핑곗거리로 또다시 부산을 찾게 되지 않을까? 그때는 하늘이 두쪽이 나는 일이 있더라도 이가네 떡볶이도 가보고 남천할매집도 기필코 정복하리라! 다음 부산 여행을 호시탐탐 엿보며 벌써부터 의지를 활활 불태워본다.


부산에서 떡볶이 맛집을 투어 하면서 좋았던 점은, 글을 쓴다는 핑계로 가족들에게 당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 지금 일 하는 거야."라며 합리화시켰을 때의 쾌감이란. 이런 게 바로 '덕업일치'가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부산,

아름다운 떡볶이의 추억은

고이고이 내 마음속에 저장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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