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별별 떡볶이를 접하다 보니 이제 웬만한 재료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치킨카레 떡볶이, 차돌박이 떡볶이, 곱창 떡볶이, 핫도그 떡볶이 등 나름 이색 떡볶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의 존재에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그리 이질적인 조합도 아니지 않던가? 굳이 맛보지 않더라도 대충 맛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니까.
하지만 '무'는 달랐다. 분명 평범한 재료인데도, 떡볶이와 무의 조화는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단짠단짠 하고 아삭아삭한 식감의 단무지도 아니고, 어묵탕에서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푹 익은 흐물흐물한 무도 아니고, 떡볶이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인공으로서 무 라니, 과연 무의 입지를 인정할 수 있을까?
무 떡볶이 소식을 접하고 호기심은 점점 커졌다. 도대체 어떤 맛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 직접 가서 먹어보고 확인해 보는 수밖에. 마침 평소에 떡볶이를 즐겨 먹는 멤버 중 한 명이 갑자기 내일 시간이 생겼다며 급 번개 모임을 신청했다. 뭐 먹으러 갈지 장소를 놓고 고민하다가 '무 떡볶이집'의 동행을 제안했다. 상대방은 흔쾌히 오케이를 보냈다. 그로부터 정확히 13시간 후, 우리는 광장시장에서 만났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착착 무떡볶이집 탐방이 성사될 줄이야! 내적 댄스가 절로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맛에 대한 궁금증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인은 무려 약속 장소에 30분이나 일찍 도착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웨이팅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며, 오픈 어택을 노리는 우리는 서둘러 목적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명 평일 이른 시간에 갔음에도 우리보다 먼저 온 팀이 여럿이었다. 이런 부지런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경쟁자, 아니 동지들은 비단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외국인 일행도 곳곳에 있었는데, 해외까지 떡볶이 맛집으로 소문이 난 모양이다. 괜히 국뽕이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좋은 건 널리 알려야 하니까.
큼직한 철판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떡볶이는 언뜻 보면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한 가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수북이 쌓여있는 뽀얀 자태의 무채의 모습,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니 그 무채가 떡볶이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는 점은 확연히 여느 떡볶이와는 달랐다. 다들 이런 기이한 자태를 보고 놀라는 눈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찰칵찰칵 인증샷을 찍기 바빴다. 금세 동이 나는지 떡볶이 철판은 동시에 두 개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풀가동 중이었다. 서둘러 주문을 하고 드디어 대망의 시식. 내 살다 살다 무가 들어간 떡볶이를 먹게 될 줄이야...
"어, 이거 왜 어울리지?"
"그러게! 왜 이렇게 맛이 익숙하지?"
나름 오랜 경력을 보유한, 자칭 '떡볶이 시식단'의 엄격한 입맛에도 무난히 통과되었다. 별로였으면 가차 없이 비판을 날렸을 텐데 말이다. 먼저 무의 단 맛이 느껴졌다. 완전히 무르지도, 그렇다고 생 무처럼 딱딱하지도 않은 적당한 식감이었던 점도 놀라웠다.
쫀쫀한 가래떡과 부산 특유의 진득하고 달달한 양념, 여기에 무의 어울림은 꽤 괜찮았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찐친은 몇 년 만에 만나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것처럼, 떡볶이와 무의 조합이 그러했다. 평소에 식탁에 자주 오르는 익숙한 식재료라 그런 걸까?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떡볶이와의 만남이었지만, 이상할 만큼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무는 참 다양하게 음식에 활용되는 재료이다. 깍두기, 동치미와 같은 김치는 물론이고 국이나 탕에도 단골로 들어가는 재료이자, 조림에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들기름 휙휙 두르고 넉넉하게 들깨가루를 뿌려서 만드는 무나물은 우리 집의 인기 메뉴이기도 하다. 그 어떤 음식에 출동해도 어색함이 없는, 그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도 그럴싸한, 그야말로 적응력 만렙 '무 반장'이라고 칭해도 될법한 무를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분명히 존재감이 있는 재료였거늘, 왜 그동안 나는 떡볶이에 무를 등장시킬 생각을 못 했던 걸까? 나의 편협했던 시각을 반성한다. 아무튼 이 둘의 만남은 분명 신박한 조합이었으나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무와 떡볶이의 조합, 앞으로도 대 찬성이요!"
무 떡볶이의 맛을 검증하기 위해 1차로 발 빠르게 시장으로 달려가서 맛을 보았다면, 2차로는 집에서 맛집 따라잡기를 해보았다. 그때 먹었던 그 맛을 잊기 전에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보며 흉내 내보았다. 이렇게 늘 연구자의 자세로 제대로 복습까지 마쳐야 무 떡볶이를 완전 정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공부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했어야.....)
떡집에서 사 온 말랑말랑한 떡볶이떡을 야심차게 준비하고, 얼마 전에 사놓은 세상 소중한 신상 떡볶이 소스를 넣고 나머지 재료들을 휘뚜루마뚜루 넣어주었다. 분명 시판 떡볶이보다는 맛이 덜할 테니, 반칙인걸 알지만 대파와 어묵 정도는 허용해줘야 할 것 같아서 슬쩍 투하시켰다. 여기에 기세등등하게 등장하는 오늘의 주인공 무채도 듬뿍 준비해서 아낌없이 넣었다. 사 먹었던 것과 똑같이 가래떡으로 만드려다가 국물을 졸이는 시간도 필요하고, 가정용으로는 아무래도 장비가 딸리는 등(아무래도 떡볶이용 대형 철판 하나 사야 할 듯) 이런저런 핑계로 좀 더 빠른 시간에 만들기 쉬운 떡볶이떡임은 감안해 주기를.
그 맛은 과연 어땠을까? 동일한 조건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만든 무 떡볶이도 제법 괜찮은 맛이었다. 아, 무가 들어가는 이상 실패란 없나 보다. 은은하게 감칠맛도 더해지고, 야채가 들어가서 속도 편하고 양도 푸짐해져서 좋았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무의 식감이 관건이었기에 너무 오래 끓이지 않는 게 포인트였다. 떡에 양념이 배도록 욕심을 부려 한참 졸이다 보면 무의 식감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무떡볶이를 영접했을 때의 감흥과 비할 바가 아니었고, 코드가 맞는 떡볶이 파트너가 없었다는 치명적인 단점은 극복할 수 없었지만 나만의 특별한 떡볶이 레시피로, 비장의무기가 생긴 것 같아 한 없이 든든했다. 당시 같이 무떡볶이집에 동행했던 언니에게도 사진을 공유하며 자랑을 해봤다. 맛이 어땠을지도 궁금해했지만, 그보다도 나의 떡볶이에 대한 과도한 열정에 놀라는 눈치였다.
아무튼 당분간은 집에서 만드는 떡볶이에는 무가 자주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이 좋은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싶어 후회스러울 정도랄까? 그만큼 내 입맛에 잘 맞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색 재료가 들어간 '특이한 떡볶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끽해야 통마늘 튀김 떡볶이, 깻잎 떡볶이 정도였다. 이 둘도 냉장고에 흔히 있는 재료지만, 떡볶이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의외로 꽤 근사하게 떡볶이 맛을 변신시켜 주는 효자템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여기에 '무'가 추가됨으로써 2023 F/W 컬렉션이 완성된 기분이다. 떡볶이 맛의 스펙트럼이 좀 더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래서 사람은 많은 경험을 해봐야 성장하는 건가 보다.
어느새 한 달만 지나면 곧 새해가 된다. 2024년에도 떡볶이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을 바탕으로,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을 열심히 발휘하여 내 사랑 떡볶이의 견문을 더욱 넓히겠노라 다짐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에 발견한 시래기 떡볶이도 호기심에서 멈추지 않고, 조만간 시도해 봐야겠다. 물론 사 먹기도 하고, 직접 만들어도 먹어야 함은 당연한 일.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시식도 권해보며 떡볶이를 다각도로 진지하게 연구해 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