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고운 Oct 16. 2023

이토록 떡볶이가 낭만적일 수 있다니!

기찻길 옆 허름한 노포에서 떡볶이의 재발견

가성비 뛰어난 구성, 초대형 산책로, 오랜 전통, 오픈키친으로 확인되는 청결함 등등 제 아무리 유명한 맛집이라 한들 가장 중요한 본질은 '맛'이다. 떡볶이를 파는 분식집의 승부수도 단연 '맛'으로 맛집의 여부가 좌우된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깨준 떡볶이집을 만났다. 바로 충정로에 위치한 철길떡볶이.


우연히 사진을 접하고 홀린 듯 한참을 쳐다보았다. 야외 테라스 바로 앞에 기차가 지나가는 이색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떢볶이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먹킷리스트 1순위로 오른 건 당연지사. 하지만 멀리도 아닌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발걸음을 옮기기가 왜 이리도 힘들던지. 당시 한여름이었던 터라 이 더위만 한풀 꺾이면 반드시 출동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언제 철길떡볶이를 가 볼 수 있을까?'를 속으로 수십 번을 되뇌고서야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근처에 사는 친한 동생과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 마저도 약속이 취소되었다가 변경되기를 몇 차례 반복한 후 참 어렵게도 성사되었다. 물론 혼밥에 익숙한 나는 혼떡도 문제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이곳은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과 같이 손에 손 잡고 찾아가서 함께 조잘거리며 이 감격을 누리고 싶었다. 혼자 갈 때 보다 메뉴도 더 다양하게 시킬 수 있다는 실질적인 이득이 있기도 하고.


생각했던 대로 한눈에 봐도 허름한 외관의 노포였다. 여기저기 넝쿨로 둘러싸여 있는 와중에 가게 이름이 간신히 드러나고 있었다. 인테리어에 손을 대지 않은지 한참은 지난 게 분명했다. 삐그덕 대는 마룻바닥을 지날 때는 위태롭기도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멋으로 느껴졌다. 수수한 느낌 그대로 랄까? 하여간 떡볶이 앞에서는 한없이 마음이 너그러워진 모양이다.    

 

노포의 특징 중 하나, 바로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업시간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토요일과 공휴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또한 어묵, 어묵국물, 음료수 등 상당 부분이 셀프서비스다. 테라스 좌석은 수저까지도 스스로 챙겨가야 한다.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지만,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철길떡볶이는 11시에 오픈이지만,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부러 여유있게 11시 반쯤이 되서 도착했다. 떡볶이 양념이 녹진족진 잘 스며드려면 끓이는 시간이 필요해서라는 나름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계산을 한 터. 게다가 '설마 평일 아침부터 떡볶이를 먹으러 뭐 얼마나 오겠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변 직장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같은 떡볶이 충성 고객들이 각지에서 몰려든 듯했다. 다들 야외테라스를 차지하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이고, 인증샷을 찍어대기 바빴으니까. 어쨌거나 야외 테라스 좌석에 안착할 수 있었다. 휴 얼마나 다행인지! 실내에도 물론 넉넉하게 자리가 있지만, 그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다. 세상 낭만적인 기찻길 뷰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호기롭게 야외 테라스를 차지했지만, 처음 방문해 본 나와 일행은 어리바리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번에 갈 때는, 막힘없이 척척 주문해 내는 경력자 포스를 뽐내리라!) 가게에 붙여놓은 주문방식 설명을 정독하고,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눈치껏 따라잡으며 종이에 메뉴를 적어서 냈다.


분명 설명문에 적힌 대로 잘 소화하려 했지만, 어묵이 너무 멀리에 담겨있었다. 거의 주방에 몸이 반쯤 들어가야만 손이 닿는 거리. 바쁘게 움직이는 주방을 바라보며 한참 머뭇거리다가 "저기, 어묵은 여기 있는 거 가져가도 되는 거지요?"라고 질문을 했다. 한 10초가 지나서야 겨우 대답해주는 주인분.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초조하게 느껴지던지.... 생각해보면 정신없이 주문이 밀려드는 상황에서 질문 따위는 사치였다. 다음에는 조심해야지.


점점 우리 팀 뒤에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못 먹었을 수도 있었겠다며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동시에 한편으로는 묘한 승리자의 기분도 맛보았다. 앞에는 끽해야 두 팀이 있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메뉴가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대량 구매하는 큰 손 고객이 있었던 것이다. 10인분의 떡볶이를, 그것도 미리 준비해 오신 김치통에 가득 담아서 말이다. 철길떡볶이에는 떡볶이 철판이 두 개가 있었는데, 둘 중 한쪽에 담겨있던 떡볶이를 거의 다 쓸어갔다.


'와, 저분 배운 분 이네!'이라는 감탄사가 먼저 터져 나왔고, 마치 성공한 사람의 척도같이 보여서 세상 멋져 보였다. 백화점 명품샵에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계산할게요"라고 하는 분 같았다고나 할까?(나도 다음에는 큰 통을 준비하리라 소심하게 다짐해 보았다.) 아무튼 먼저 온 분이 떡볶이를 상당 부분 먼저 차지했기에 옆 철판의 떡볶이가 끓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기다림의 미학이랄까? 떡볶이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커져만 갔으니까. 한편으로는 너무 큰 기대를 했다가 실망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걱정도 살짝 들었다.


줄 서서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동지애를 느끼기도 했고, 대체 떡볶이가 뭐길래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심지어 요새는 로봇이 테이블로 음식을 배달해주고, 몇 번의 클릭이면 포장이고 예약이고 다 되는 최첨단 시대에 살면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며 누추한 곳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가격이 저렴해서'라는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음식 가격이 높든, 낮든 돈을 내는 소비자인 건 동일한데 왜 이렇게 기꺼이 불편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런 고민의 답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주문을 하면 종이에 적어서 낸 이름 혹은 닉네임을 불러주는데, 참으로 정겹기 짝이 없었다. 보통은 "1번 테이블", 혹은 "김밥 3, 떡볶이 3 주문하신 분"이렇게 불러주지 않던가? 하지만 "XX 씨"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 "김대표님"과 같이 정중한(?) 호칭을 불러주니 받는 사람도 참 기분이 좋았다. 작은 차이이지만 그야말로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았다. 익명의 어떤 고객이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받는 느낌이랄까? 괜히 주인분과 친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또 하나,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찻길 풍경이 이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수시로 기차가 지나갔는데, 새마을호 열차부터 시작해서 KTX까지 그 종류도 참으로 다양했다. 다양한 기차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런 압도적인 뷰가 지금까지 겪었던 불편함을 한 방에 상쇄시켜 주는 듯했다. 선선해진 가을 날씨가 이렇게도 반가울 줄이야. 이 때를 위해 올해의 지긋지긋하게 덥고 길었던 여름을 이겨낸건가 보다 싶었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메뉴가 나왔다. 떡볶이, 못난이, 어묵, 순대, 탄산음료로 한 상이 차려졌다. 때 마침 고맙게도 기차가 지나가주었다. 이를 놓칠세라 열심히 사진과 동영상을 재빨리 남긴 후 대망의 시식에 들어갔다. 사실 뷰가 다 했기에, 맛이 별로여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떡볶이를 입에 넣는 순간, 어린 시절 방신시장에서 먹던 떡볶이의 맛과 오버랩되었다. 마치 아련한 첫사랑을 조우한 기분이랄까? 평소에 메마르기 짝이 없는 사람임에도,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철길떡볶이에서 이런 감동을 느껴보게 될 줄이야. 사무치게 그립던 그 맛, 지금 여기에서 느낄 수는 나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이 날의 공기, 온도, 습도, 바람 모든 게 완벽했다. 시끄러운 기차소리마저도 소음이 아닌 기분 좋은 음향효과로 느껴졌다.


역시나 밀떡은 진리였다. 쫀득쫀득하고도 보들보들한 떡의 식감 그리고 색깔만큼 맵지 않은 양념의 조합은 훌륭했다. 고추장보다는 고춧가루를 베이스로 한 듯 깔끔함이 느껴졌고 많이 달지 않아서 더 좋았다. 맛에 대한 관점은 지극히 관적이겠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가장 선호하는 맛이었기에 평가를 내려본다면 별 다섯 개도 아깝지 않았다.


순대는 부속이 없이 순대만 나와서 더 좋았고(물론 같이 간 동생은 아쉬워했지만), 어묵은 충분히 불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연신 우리는 싱글벙글이었다. 이런 보석 같은 떡볶이 맛집을 이제야 방문하다니, 아니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싶었다. 언젠가는 문을 닫는 날이 올 수 도 있으니, 사라지기 전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겠다 싶었다.  


아무튼 다른 메뉴들도 시켰다는 이유로 떡볶이를 고작 1인분만 주문했던 것은 큰 실수였다.

"언니, 아무래도 1인분으로는 부족하겠죠?"

"그러게. 먹다 만 기분이네. 얼른 1인분 추가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속하게 추가 주문을 했다. 오늘 하루 반성되는 일을 꼽으라면 '떡볶이를 1인분만 시킨 일'이고,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신속하게 떡볶이 1인분을 추가 주문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넉넉하게 떡볶이를 먹고 나니 그제야 조급했던 마음이 훨씬 풍요로워졌다. 사실 요새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난리를 떨던 참이었다. 아침식사로 야채주스를 마시고,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고집했지만 떡볶이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래도 이런 한 번의 일탈쯤은 허용해 주는 게 내 몸에 대한 도리 아닌가? 아무튼 지금도 후회는 없다.  


집에서 철길떡볶이까지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왕복했기에 그나마 덜 죄책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한강공원에서 마포로 빠져나오는 복잡한 길도, 한참 동안 이어진 숨 가쁜 언덕길도 너끈히 이겨낸 후에 먹은 떡볶이 맛의 감동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좋은 멤버, 적당한 운동량, 먹겠다는 굳은 의지, 테라스 좌석, 완벽한 계절, 이 모든 컨디션이 허락되었음에 감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의문박물관에 있는 학교앞분식집의 떡볶이도 철길떡볶이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물론 그곳에서도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지만, 기찻길 풍경이 있고 없고 여부에 따라 감흥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누군가가 "낭만이 밥 먹여주냐?"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있으니까.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터라 맛의 위대함을 결정하는 데는 풍경도, 계절도 한몫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경험했다. 같은 장소이지만 한 여름이나 한 겨울에는 당연히 감흥이 덜 했을 것이다. 가을은 떡볶이를 즐기기에 완벽한 계절임에 틀림없다. 정신없이 떡볶이를 음미하느라 하얀색 옷에 빨간색 떡볶이 양념 자국을 남기긴 했으나 이 또한 영광스러운 상처로 받아들였다. 집에 오자마자 가열하게 빨래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매일 숙제같이 쌓이는 하기 싫은 집안일, 학업이고 건강이고 끊임없이 두 아이를 돌보는 일, 계절마다 찾아오는 침구 정리 옷 정리 미션, 교회에서 감당해야 하는 일 등 시간은 부족하고 해치워야 할 일들로 숨이 턱 막혔던 요즘,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되어준 힐링타임 이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적당한 구름 사이로 너무 눈이 부시지도, 너무 흐리지도 않은 날씨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먹었던 떡볶이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해 주기 충분했다. 이 순간만큼은 호텔의 화려한 뷔페도, 값비싼 스테이크도, 고급요리의 대명사인 킹크랩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행복했던 추억을 한가득 안겨주었던 이 날의 두 가지 결론은,


"행복은 가까이에"

"가을엔 떡볶이를 먹겠어요"

이전 10화 떡볶이에 진심인 메이트를 소개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