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음양탕(찬물과 따듯한 물을 섞어서 만드는 것)을 한 잔 마시며 아침을 시작한다. 그리고 직접 야채를 갈아서 만든 스무디를 천천히 마신다. 식사 때는 최대한 백밀가루가 든 음식은 피한다. 단 맛은 알룰로스와 같은 대체 당이나 꿀이나 메이플시럽 등의 천연 음식을 선택한다.
매 끼니 가능한 풍부한 야채와 양질의 단백질을 챙겨 먹는다. 백미가 아닌 현미밥이나 잡곡밥을 먹는 건 당연한 일. 식사는 배부르게 하지 않고 적당한 포만감이 들 때 멈춘다. 야식은 절대 허용하지 않으며 최소 12시간 공복을 유지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마치 다이어터의 정석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큰 이변이 없는 한 매일 지키고 있는 나만의 철직이다. 하지만 이러면 뭐 하냐고!
떡볶이 앞에서는 소용없는 걸. 평소에 열심히 지켜온 식습관이라는 공든 탑이 여지없이 와장창 무너지고야 만다. 세상 이율배반적인 삶이 따로 없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혹은 번아웃이 오려고 할 때, 입맛이 없을 때 등등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단연 떡볶이다. 자기 방어를 위한 본능에 가까운 선택이랄까? 원초적인 자극적인 맛에 항복하고야 마는, 나란 존재는 떡볶이 앞에서 만큼은 왜 이리도 나약하단 말인가.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래서 다이어트는 매일 실패로 돌아간다. 그냥 현상유지 하는 정도에 만족해야 하려나?
'일단 살고 봐야 한다!'
라는 나름의 당당하고 합리적인 변명을 앞세우지만, 정신없이 떡볶이를 한 그릇 먹어치우고 난 후 이성을 차려보면 후회가 남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래도 또 한편으로는
'역시 떡볶이만 한 게 없지.'
라는 생각과 함께 긍정회로가 돌기 시작하는 걸 보면 이만한 특효약도 없는 것 같다. 매력적인 나쁜 남자를 끊어낼 수 없는 뭐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내 뜻대로 통제되는 유일한 것이 '내 몸'이라고 하지만, 삶의 큰 즐거움인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 아는 맛인데, 그냥 참고 넘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달고 짜고 맵고, 다이어트를 한다면 피해야 할 완벽한 3박자를 갖춘 최악의 음식임에 틀림없다. 슬프게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다.
언젠가 한 번은 떡볶이를 더 이상 먹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언을 해봤다.
"당신이 그게 가능할까?"
"엄마, 그냥 먹어요. 어차피 실패할게 뻔한데."
코웃음을 치는 가족들을 보며 내가 이번에는 기필코 떡볶이의 유혹을 이겨내 보겠노라 다짐했지만, 결과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되시리라. 한동안 떡볶이를 머릿속에서 지워보려 애썼지만, 자꾸만 맴도는 그 맛에 항복하고야 말았다.
'그래, 40대 아줌마가 비키니를 입을 것도 아니고, 무슨 미인대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충 적당히 살지 뭐.' 라며 스스로에게 구구절절 핑계를 대보며 애써 괜찮은 척했다.맞는 말이긴 하니까. 아, 언제쯤 몸에 구애받지않고 마음껏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이번 생은 글렀구나.
어쨌거나 오래간만에 먹은 떡볶이는 참 반갑고 감동적이었다. 식사 후에는 애플사이다비기너를 한잔 마시며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달래 보았다. 병 주고 약 주고 라니... 이런 내 모습이 왜 이렇게 아이러니하던지.
"엄마, 또 다이어트 망했네요. 내가 그럴 줄 알았지요"
얄미운 딸을 보며 눈빛으로 레이저를 한바탕 쏴준다. 늬들이 평소에 말을 잘 듣고 사고 좀 치지 않으면 엄마가 떡볶이를 더 참을 수 있었는데, 원인 제공은 너란 말이야! 전적으로 너희들 때문이라고!!
그래도 떡볶이를 얼추 한 달 가까이 참아본 거였다. 억울하게도 그렇다고 체지방이 확 줄거나 드라마틱하게 몸의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최소한 '몸 건강 유지'라는 미션을 획득했을지만 정신적로는 만신창이가 된 듯했다. 소울푸드를 끊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 이던지. 차라리 먹는 횟수를 줄이거나 먹는 방법을 바꾸는 게 현실적인 목표였나보다.
'그래, 이왕 먹어야 한다면 떡볶이를 조금이라도 덜 죄책감을 가질 수 있도록 건강하게 먹어보자.'라는 생각에(라고 장황하게 써 보지만 결국은 살/찔/걱/정 이라는 4글자로 설명할 수 있겠다) 단백질인 어묵과 삶은 계란 그리고 두부도 추가하고 양배추, 파, 양파와 같은 야채는 듬뿍 넣어줬다. 설탕이 아닌 알룰로스와 같은 대체당을 넣고, 밀가루 떡이 아닌 현미떡을 넣어봤다.
"다행히 이렇게 건강하게 떡볶이를 만들어도 맛있구나."라는 반응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사랑하는 그 떡볶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 자존심 상해! 내가 원하는 떡볶이는 이게 아닌데.
"곱게 자란 잘생긴 재벌 2세 부잣집 도련님은 매력이 없단 말이다!!!!"
백밀가루떡에 백설탕, MSG 넣은 시판 떡볶이의 완승이었다. 분명 좋은 재료로 만든 건데, 배신감 내지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재료와 조리법을 바꾼 떡볶이는 영 허전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았을 정도랄까? 입맛만 버렸다.
일단 현미떡은 푹 퍼져서 식감이 영 아니었다. 쫀득한 식감을 잃었다는 건 떡볶이로써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떡볶이는 자고로 오래 졸여서 떡이 양념장이 잘 배어야 제맛이거늘, 끓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현미떡은 힘 없이 흐물거렸다. 그렇다고 조리 시간을 짧게 잡아보니 양념과 떡이 따로 놀았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곁들인 재료로 삶은 계란이나 어묵까지는 괜찮지만 두부는 좀 애매했다. 마치 두부조림을 먹는 기분? 뭔가 상황에 안 맞았다. 마치 한복을 입고 파스타를 먹는 듯한, 혹은 잠옷을 입고 근사한 바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모습같았다. (그렇다고 닭가슴살을 곁들이는 것 까지는 너무한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러다가 시중에 파는 다이어트 떢볶이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어 검색에 돌입했다. 다이어터 동지들의 상품평을 보니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가격이 꽤 사악했다. 곤약 떡볶이, 카뮤트밀 떡볶이, 저당 떡볶이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왠지 드라마의 뻔한 결말처럼 맛없게 먹고 실망하거나 분개하거나 하는 내 모습이 상상되었다. 이 돈 주고 먹느니 안 먹고 만다는 반발심도 들었다.
비유를 하자면 자연치즈가 아닌 모조치즈를 굳이 2,3배 비싸게 사 먹을 필요 없지 않은가? 게다가 택배로만 구매할 수 있으니, 훅 하고 갑자기 떡볶이가 당길 때 바로 먹을 수가 없다는 점도 아쉬웠다.
좋게 좋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먹으려고 운동한다는, 먹으려고 평소에 식단을 잘 유지해야 해야 하며, 고로 나는 떡볶이를 먹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치팅데이에는 무조건 떡볶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떡볶이를 먹는 건 괜찮을 거야.
-먹은 만큼 운동으로 소모하면 되는 거지. 오히려 확실한 운동할 이유가 생겼네.
비록 그토록 원하는 날씬한 몸은 평생 이룰 수 없는 목표지만 그냥 나답게, 떡볶이와 적당하게 사이좋게 건강하게 살아가야겠다.
얼마 전에 본 뉴스가 기억에 난다. 다이어트 억제제를 처방받으려고 여성들이 줄 선 모습을 보도한 내용인데, 댓글이 기가 막혔다.
"떡볶이를 줄이던가, 운동을 하던가."
어찌나 뜨끔 하던지. 나 말고도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겪는 고민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동질감이 들며 웃음이 났다. 이거 다 같이 단체로 떡볶이에게 고소장이라도 제출해야 하는 걸까? 아니지,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잘못인 걸로 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