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끝나나 싶었던 여름도 마지막은 무력했다
추석이 지나자 무가 칼에 베이듯 여름은 싹둑 끝났다
일교차가 심해 긴팔에 가디건까지 입었다
"버스에서 창문을 열었는데 바람이 차가운 거야. 섬찟할 정도였어. 그렇지만 닫지는 않았어. 이 계절의 인사니까.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싶더라고. 처음으로 따뜻한 커피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얗고 사발처럼 큰 머그잔에 아메리카노가 김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무릎을 살짝 덮은 치마를 입은 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가늘고 긴 유리컵 표면에 식은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너의 유리컵에 흐르는 물방울을 가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그만 헤어지자."
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얼음이 유빙처럼 컵 중앙으로 유영하고 있었다
얼음이 멈추고 아메리카노의 수면이 얼어붙었을 때 너는 고개 들어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바람이 너무 차가워"
날 올려보는 너의 눈은 알 수 없는 뭔가로 가득찼다
의문인가? 분노인가? 혼란인가? 살기인가? 허탈인가?
"갑자기 모든 게 변한 거 같아. 공기마저 너무 차가워"
그렇다, 개소리다
7년 사귄 너와 이별하는데 너무 개소리다
그렇지만 버스에서 찬바람을 맞고 오늘 너와 헤어져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분명하다
헤어지자 말하는 너의 눈은 산장에 박제된 사슴의 눈처럼 크고 검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찬바람 때문에 헤어지자는 개소리가 순간 수긍이 됐다
나는 '차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선선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리는 일년에 네 번이나 크게 있는 계절의 변화마저 서로 달리 느낄 정도로 다른 사람이겠다 싶었다
"일교차 때문에 비염이 심해져서 너랑 못 만나겠어"
"가을은 남자에게 고독한 계절이라 연애를 못하겠어"
이런 핑계였다면 구질구질하다 생각했겠다
하물며 드라마처럼
"다른 여자가 생겼어"라고 했다면 너무 뻔한 남성상이라 네게 실망했겠다
"바람이 차다"에는 내가 네게 반했던 너만의 개성과 감성과 성상이 있다
헤어질 이유로 어쩌면 가장 너다웠다
3년이 지났다
아침 바람에 코끝이 시큰하고
들이켠 첫 호흡이 갈비뼈를 아리게 하고
한낮의 태양은 배신감을 주며 덥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서럽도록 노을이 아름다운
이맘 때면
나는 노을의 끝을 잡고 너의 사슴 눈을 떠올린다
너의 9월 끝자락은 여전히 차가운지?
너의 감성은 여전히 변덕스러운지?
너의 팔뚝은 여전히 매끈하고 단단한지?
헤어질 때 쏟아내는 모진 말들이나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냉정한 뒷모습은
결국 기억에 의존한다
잊으려 하면 잊혀진다
세월이 흐르면 흐려진다
그런데
가을을 싣고 오는 찬바람처럼
밤새 몰래 내린 첫 눈처럼
언 세상을 조용히 녹이는 봄 새싹처럼
생기 가득해 씹어먹고 싶은 초록 이파리처럼
몇 달 익숙해진 계절을 뒤짚는 자연의 습격과 기억이 만나면
화학작용이 폭발해 머릿속에 블랙홀을 심어버린다
그럴 때에는 슬픈 일을 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