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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Nov 19. 2024

맞고 산 여자


5시인데도 벌써 하늘은 물들어갔다

주방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라면을 먹을 참이었다

밖에서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놀이터 그네가 교복 입은 학생이 버거운지 삐그덕대는 소리를 냈다

카드 청구서 주소지를 바꾸지 않은 게 생각났다

TV에서는 오은영 박사가 게으른 여자를 나무라고 있었다

엄마 병원 예약을 하루 미뤄야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홍석이가 내 무릎에 볼을 비비며 누웠다

전화가 울렸다. 창원으로 출장간 남편이었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베란다 문을 닫고 TV 볼륨을 줄였다

벨이 열 번을 채우지 않았을 즈음 받았다


-뭐하는 데 이제 받어?

"어... 씻었어요."

-정신나간 년아, 이 시간이 씻을 때야?

홍석이 배를 만지는데 따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 안이었다

옆에는 홍석이가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동은 켜져있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출발을 못했다

다시 정신을 붙잡는 음성이 들렸다

-내가 갈 때까지 이자 정산 안 해놓으면 그 개새끼 베란다로 던져버릴 줄 알아!

엔진 브레이크를 내리고 엑셀을 밟았다

가야할 곳을 확정했다

친구가 보내준 변호사 사무실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제대로 말이 안 나와서 바쁜 변호사를 한 시간이나 붙들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 지인이라 인내심 있게 들어줬다

변호사는 친절히 말해줬다

"잘못은 전혀 없어요. 그 실수는 유책사유가 아닙니다. 잘못한 건 없고 남편분의 폭력성은 충분히 이혼 사유예요. 다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어요. 이렇게 나오시면 이건 가출이에요. 남편에게 유리한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어요."


그의 얼굴을 보고 이혼하자고 내가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손바닥으로 때렸지만 그 말을 뱉으면 입에 주먹을 날릴 수도 있을텐데

그가 너무 무섭다

나는 그 앞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못난 바보인데 그에게 이혼하자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출장지에서 새벽에 돌아왔다

청소 상태를 꼬투리 잡아 모진 말을 내뱉은 후 뺨을 몇 대 갈겼다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참아내고 그 밤을 끝냈다

홍석이가 끙끙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출근을 하면서 하루동안 끝낼 일을 지시했고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홍석이를 정말 5층에서 내던질 거라고 단언했다

그에게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오후 네 시였다

네 시면 마감하느라 바쁠 그는 내 톡을 몇 십 분 늦게 볼 것이다

'충분히 생각했고 충분히 용기를 냈어요. 이혼해요. 오늘부터 홍석이와 나가겠습니다. 당신에게 진 빚은 당신이 정한 룰에 따라 갚아나가겠습니다."

그는 4시 50분경 톡을 확인했지만 답은 없었다

8시쯤 전화가 왔고 그는 아무 타격감 없는 욕설만 늘어놨다

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들었고 톤이 낮아진 후 끊고싶다 선언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내게,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선머슴아처럼 뛰댕기냐고 하셨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골목대장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남자들과 주먹다짐해도 지지 않았다

중학교에서는 활달한 성격에 성적도 좋아 학생회장도 했다

여고로 진학해서는 문학에 빠졌다

그래서 대학을 영문과로 갔다

부모님 어깨를 들썩일 서울 명문대학에 진학했고 영국으로 유학도 다녀왔다

일찍이 선진의식을 받아들인 덕에 남들보다 빠르게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선언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남녀차별이 있다면 미친개처럼 싸웠다

그래도 연애는 쉬지 않고 했다

내가 찾지 않아도 남자가 내게 왔다

사랑에 구원 받은 적도,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래도 남자들은 그런 나의 무신경함을 시크함이라 정의하며 붙었다


서른 중반이 돼도 결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이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자의 홀로서기가 어려웠고

결혼제도는 더더욱 여자의 숨통을 조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차례 직장을 옮기다가 굴지의 언론사에 취직했다

말로는 누구에게도 안 질 놈들이 수백 명이었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고성, 토론, 담배연기, 걸죽한 입담, 찡그린 얼굴들 속에

고고한 학처럼 그는 단정한 머리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남자였다

우린 일 얘기를 하다가 친해졌고

책 얘기를 하다가 깊어졌다

그가 니체의 초인을 설명하면서

"어쩌면 상대성이론을 밝힌 아인슈타인은 니체를 좋아했을 거예요. 미지의 초인에게 닿는 방법을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거든요.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하다 스스로 초인에 다다른 것 같아요."며 수줍게 말했을 때,

붉어진 볼을 감추려 뿔테안경을 밀어올리던 마른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됐다 


2년을 만나다 결혼했다

결혼도 원치 않던 그였지만 내겐 같이 살 명분이 필요해 결혼식이란 걸 올렸다

마당이 있는 낡고 작은 주택이었지만 우리에게 잘 어울렸다

결혼이 그의 일상에 작은 변화는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살았다

그가 인정하는 관계의 세계는 본인의 부모님과 형제였고,

결혼 이후 나 1인이 추가됐다

나는 내가 그의 세계에 포함된 것에 크게 안도했고, 

'사랑한다' 고백 받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이 됐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났을 때

그가 아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우린 강아지를 입양했다

아이를 대신할 수 있을까 싶어서 두 발로 서면 가슴까지 닿는 견종을 골랐다

우린 여느 가족처럼 홍석이와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고 주말에는 여행을 다녔다

홍석이가 있어 우리가 늙어도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로운 결혼생활이었다

저수지의 잔잔한 수면같은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결혼생활은 저수지의 검은물이었나보다

너무 고요해 살기를 키우는 적막이었다


결혼 5년차에 별안간 노후가 걱정됐다

남편은 쉰을 넘어섰고 나는 마흔 중반을 향할 때였다

둘 다 기술직이 아니었기에 은퇴 후에도 지금처럼 낭만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지인의 사업에 투자를 했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사업은 2년을 못 버티고 망했다

작은 사업체였기 때문에 들어간 내 돈은 2천만원이었지만

작든 크든 부도는 생각치도 못한 상황을 끌고오는 악의 고리였다

지인은 두 손 들고 사라졌고

알지도 못하는 거래처에서 내게 외상장부를 들고 왔다

나와는 거리가 멀던-이름은 들어봄직한-기관들에게서도 고지서가 들이닥쳤다

급한 대로 비자금을 털고

친정에 손을 벌리고 

친구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겨우 겨우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지인이 쓴 사채는 5천만원으로 불어 턱밑까지 칼을 겨눴다

절대 남편이 알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내게 겨눠진 수개의 칼을 피하기가 어려워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나의 고해성사를 남편은 저수지의 적막같은 얼굴로 듣고 있었다

내 입에서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잘못했어요."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남편은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 외엔 작은 감정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다

잘못했다고 고하자, 

씹던 껌을 뱉듯, "너는 병신이었구나."라고 말했다

할 말이 없다고 하자, 

"너는 이제 생각이란 걸 하지 마라."고 말했다

나를 도와달라고 청하자, 

"너는 쓰레기같은 정신상태이기 때문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집의 쓰레기가 되었다

그 사람의 고명한 관계도에서 나는 작은 점이 되었다


처음엔 멸시였다. 그가 내게 가한 고통은.

다음엔 무시였다. 나의 가슴은 구멍났다

그후엔 폭언이었다. 

이미 나는 바보 천치에 쓰레기였기에 그의 욕을 감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가 욕을 할 줄 아는 사람이란 게 신기할 뿐이었다


고목처럼 살아온 지 2개월쯤 지났을까? 

그리고 폭력이 있었다

생활비가 떨어져서 그에게 "먹을 게 없어서 장을 봐야할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세계의 정원에 대한 책을 보던 그가 

책을 덮고 

나를 돌아보고

책을 들고

미간을 찡그리더니 

책으로 내 머리를 쳤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년아.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계획이란 게 안 되니?!"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 때 왜 놀랐을까?

커진 내 눈을 노렸는지 그의 손바닥에 안경이 날아갔다

내 볼에서 난 '짝' 소리는 거실벽 삼 면에 튕긴 후 베란다로 날아갔다

여름이 오려고 습하고 후덥지근한 지열이 땅의 쿰쿰한 냄새를 5층까지 밀어올리던 때였다


시작이 어렵지 다루기 쉬운 도구와 상대적 우월감이 만들어내는 쾌감은 중독성이 있었다

그의 정갈하던 언어와 섬세한 손가락은 그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다뤘다

내게 욕을 하면서 그는 더 고고해졌고, 내게 손찌검을 하면서 그는 더 강해졌다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전혀 그에게 대항할 생각을 안 했다

나는 집안을 말아먹은 바보였고 

가족과 친구들의 돈도 거덜낸 병신이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이고 탐미적인 그의 언어들이 그런 내 지위를 명징하게 고정했다


눈에 든 멍을 가리기 위해 선글래스를 쓰고 회사에 갈 때도 있었다

다행히 여름이라 자외선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물리칠 수 없는 친구들 모임은 어두운 술집을 고집해 위기를 넘겨보려 했다

멍은 가릴 수 있었지만 슬픔을 가릴 순 없었다

친구들이 놀라고 분노하고 슬퍼했다

"어떻게 네게 이런 일이 생기니?

 어떻게 네가 이렇게 당하고 가만있니?

 어떻게 네가, 우리도 아닌 네가 이렇게 사니?"

나도 궁금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나를 다시 깨운 건 홍석이었다

그가 홍석이를 죽인다고 했을 때 내 안에서 

어미의 사타구니를 열고 나온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홍석이를 지켜야 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홍석이를 키울 수 있는 원룸을 얻었다

회사도 옮겼다. 작지만 내 허물도 눈감아줄 수 있는 회사였다

퇴근하면 홍석이와 산책하고 이후에는 쇼파에 누워 티비만 봤다

밥은 손에 잡히는 과자나 빵으로 대신했다

책을 보던 눈은 현란한 티비에만 두고 살았다

점점 내가 '나'가 아니었다

40년 넘게 이런 몸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이 변화가 편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시간이 편했다

단 하나 어려운 건 그와의 이혼소송이었다

그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준비는 잘 됐고 내일 접견은 길지 않을 테니 가급적 감정을 잘 누르라고 한다

감정 없이 살아온 지가 꽤 됐기 때문에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타인에게 흠잡힐 일은 하지 않으니까


홍석이가 내 다리를 베고 누워있다

티비에서는 작은 아이가 어른의 흉내를 내고 패널들을 웃기고 있다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사람들이 배고픈 시간에 오토바이 마후라는 더 크게 운다

새소리가 들렸다. 더 들어보려 하니 들리지 않았다

엄마에게 병원 검진날짜를 알려야 했다

그에게 이자를 보내고 나면 이번 주말에는 굶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티비에서 오은영 박사가 게으른 여자를 나무란다

그 여자의 게으른 눈에 내가 비쳤다


법정에서 마주한 그는 우리가 앉은 테이블과 닮았다

짙은 갈색에 반짝이는 윤기가 색에 품위를 덧입힌다

손가락 마디로 두드리면 소리를 삼키며 얕은 탄식을 뱉겠다

길게 늘어진 옹이 무늬는 제각각이지만 규칙이 있다

뻣뻣이 치켜든 그의 목에 힘줄이 불거진다

내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 저 힘줄은 유난히 붉었다

테이블에 올린 두 손은 마주잡았고 손가락이 시작되는 관절은 테이블의 옹이보다 더 강직한 주름이 잡혀있다

검은 뿔테 뒤로 숨은 눈은 볼 수가 없다

뿔테를 받히는 광대가 전보다 더 튀어나온 것이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윗입술이 얇아 언제든 벌어질 것 같았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법정을 나와서야 그는 내게 할 말이 있다며 변호사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따라 갔고 두 발을 모으고 바로 섰다

저수지의 검은 물 같은 눈으로 나를 잠시 내려보더니 얇은 입술이 열렸다

"너는 이제 자유롭겠지만 그 자유로 인해 괴로울 것이야

 너로 인해 나는 파멸됐어

 나는 너를 평생 저주할테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나는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도 움직임이 없었다.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머리를 숙일 생각은 없었는데 관성적으로 숙여졌다

그 앞에서 다시 고개를 들지는 않고 뒤돌아 오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끝이다

내가 '나'가 아니었던 5개월이 끝났다



-여자의 이야기 끝.



"돈 좀 빌려줄래요?"

내 첫 직장 사수였던 당신을 나는 당시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도 잘하고 당찼지만 일을 사랑하지 않고 잔꾀를 부려 내가 피해볼 때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2년 같이 일하고 당신이 먼저 이직하면서 멀어졌다가

SNS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일년에 한 번쯤 만나 밥 먹는 정도였다

그런 당신이 내게 일년여만에 전화해 돈을 구했다


오후 늦게 비가 쏟아질 거란 예보가 있던 날이었다

칼칼한 칼국수를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그때까진 내 얘기를 주로 했다

근래 본 책, 달리는 재미, 여름에 간 동해, 부쩍 큰 아이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손 벌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무슨 일인데?"

당신은 허탈하게 웃더니 눈물이 차오르기 전에 한숨을 한 번 쉬고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내가 왜 맞고 살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그렇게 바보 천치처럼 살았을까?

 그때의 나는 식물이었어요

 난 잘못한 게 있으니 피해자인 그의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이지 뭐."


당신이 이직 후 2~3년 후, 당신에게 남은 미움을 지웠었다

우린 그때 세월호에 대해 오래 얘기했었다

당신의 분노는 정의로웠고 공격적이었으며 맑았었다

당신의 결혼이야기도 홍석이 키우는 이야기도 강릉과 속초를 좋아해 매달 몇 번은 금요일 밤에 동쪽으로 달려간다는 것도

'역시 당신답군.'하며 감탄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치 않았다

그래서 당신은 다시 당신다운 여자로 돌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음에 우린 언 땅이 녹고 노오란 꽃이 올라올 때쯤 보기로 했다

그땐 당신도 달리고 있을 거라고, 다음 노벨문학상은 누구일지 내기를 하자고, 못먹는 술이지만 샴페인 정도는 마실 수 있으니 힙한 빠를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러자. 당신의 새 삶을 굴리는 그 발에 어울릴 예쁜 러닝양말을 선물할게

노벨문학상에 거론될 책을 더 열심히 읽고 만나자

당신 결혼식에 같이 갔던 옛날 직장 동료들도 모아 같이 샴페인을 마시자

그러니 오는 이 겨울을 정면으로 맞서자. 이겨내고 봄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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