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러진 소주병들 사이에서 폰을 찾았다
자고 일어나니 부재중전화가 12통 와있다
문자메시지나 톡은 셀 수도 없다
간밤에 내가 미친짓을 했나보다
폰에 남겨진 증거로 밤중에 일어난 일을 헤아렸다
근래 자주 만나던 친구 두 명에게는 죽이겠다고 보냈고
또 다른 친구에게는 다신 연락 말자고 통보했으며
여자친구에게는 헤어지자고 했네
어떤 이유로 그런 말들을 했는지는 생각 안 나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어제 기분으로는 살인이 어렵지 않았다
한 달 전
나를 아들처럼 예뻐하시던 큰이모가 돌아가셨다
두 달 전
이모는 곧 죽겠다며 재산 증여 처리를 위해 내려오라고 하셨다
"이모야, 이모가 왜 죽어~ 이모는 오래오래 잘 사실 거니까 그런 말 마셔."
하고 말았다
평생 운이 없는 나답게 이모는 돌아가셨다
이모는 자식이 없어서 만날 때면 유산을 내게 물려주신다고 하셨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이모부와 우리 엄마를 앉혀놓고 그 말을 유언하셨다고 한다
바닷가 촌동네 땅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이모의 약속은 내 심장에 또 다른 핏줄을 꼽아넣는 듯 따뜻했다
나는 상주 노릇을 하며 손님을 맞았다
부산에 살다 노년은 언니들과 보내겠다며 재작년에 귀향한 셋째이모는 식장이 떠나가라 곡을 하셨다
이모와 평생 옆집에서 살며 한몸처럼 자라온 우리 엄마는 돌처럼 무거운 어깨로 손님을 맞기에 바빴다
시골이라 여덟 시면 식장은 한산했고 지친 친척들은 열 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그제서야 엄마는 조문실 바닥에 바위처럼 자리를 누른채
큰이모 사진만 들여다보며 밤을 지새웠다
집에 돌아온 후 줄곧 반쪽을 잃어버린 엄마가 걱정됐다
엄마는 며칠 깊은 물 속으로 침잠하듯 무겁더니
일주일만에 수면 위로 올라 파닥였다
그러나 그 활기는 예상과 달랐다
큰이모의 유산 대부분이 셋째이모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치매 초기로 기억이 위태로운 이모부가 일사천리로 유산을 상속했다
엄마는 섭섭한 마음에 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형부, 그래도 언니가 우리 아들들에게 나눠준다고 유언을 했었는데 어떻게 다 셋째에게 갔다요?"
이모부는 한참 엄마의 말을 듣더니
"아! 그랬제! 내가 요새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실수를 했네."
셋째이모가 어떻게 이모부와 정리를 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이모의 행동은 계속 의심을 키웠다
이모는 며칠 후 동네이장과 엄마를 찾아 거문도에 남은 친정집을 처리하자고 했다
그 집은 큰이모 앞으로 돼있던 건데 엄마와 셋째이모 공동명의로 상속하자는 제안이었다
동네이장이 나서 처리를 해준다며 신분증과 도장을 받아갔다
이장은 이모보다 몇 해 전, 마을에 정착한 외지사람인데 주로 시골의 빈집과 땅을 외지인에게 중개하는 일로 돈벌이를 해왔다
셋째이모는 나와 가장 친한 이모였다
또다른 엄마라 생각하고 따랐다
부산에서 돈을 많이 벌어 만나면 용돈도 잘 주셨다
고향에 내려오고는 가족의 품에서 다시 막내처럼 귀여워지던 이모였다
그런 이모가 상속이 진행되자 무서운 어른이 됐다
정에 약한 엄마를 대신해 이모와 논의를 하려했는데
"이런 일에 애들은 빠져 있는 게 좋다."며
단박에 거절당했다
이모에게 마흔 넘은 나는 어린애였다
돈 앞에서는 나이도 없는 건데 돈 앞에서 나는 힘을 잃었다
결국 이모와 엄마는 험하게 변했다
돈보다 또 다른 형제를 잃은 슬픔에 엄마는 잠을 못잤다
언니는 하늘이 뺏어갔고 동생은 돈이 뺏어갔다
엄마는 예기치 못한 상실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들로서 나는 나서야했다
이모에게 다시 전화했다
"이모야, 엄마 좀 보소
아니 이모 언니 좀 봐달라고
돈 좀 그만 보고 핏줄 좀 봐달라고요
우린 이제 돈 필요 없소
이모도 그 돈 아니더라도 살 수 있잖아요
왜 우리가 이렇게 갈라서야겠어요
이모 왜 이래
내가 알던 이모 맞나?"
이모는 우리 이모가 아니었다
결국 이모와의 추억을 와장창 박살낸 채 전화는 끊겼다
나는 무너졌다
방바닥에 허물어진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나를 세우기 위해 술을 마셨다
소주로 채웠다
밑 빠진 독에 끝없이 채웠다
평소 안주로 먹던 구운계란도 입에 대지 않았다
소주가 아니면 다 부도덕한 것들이었다
엄마가 아니면 다 부도덕한 사람들이었다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이모를 생각하니 소주가 끝나지 않았다
슬픔으로 가득찬 가슴으로
알코올에 잠식된 뇌로
독기로 마비된 혀로
이모에게 전화했다
슬픔이 알코올에 휘발된 독기는 악랄했다
마비된 혀로 제대로 된 말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다
무얼 말하는지
어떤 메아리가 오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퍼부었다
이모로부터 전화가 뚝 끊겼다
그걸로 우리 핏줄은 끊긴 것이었다
그 후에 친구들에게 전화한 것 같다
우울증에 빠진 나를 구원해준 친구들인데
겨우내 앙상하던 나를 먹여살린 친구들인데
세상이 버려도 내 편이던 여자친구인데
다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무엇이 내게 칼을 쥐어줬을까
코인 크게 먹었다는 P
아내와 골프 치러 다니는 S
경찰인데 지역유지들에게 밥 얻어먹고 다니는 Y
수년째 같은 잔소리를 해대는 여자친구
이런 것들이 내게 칼이 됐을까?
알코올이 칼날을 갈았을까?
이모가 칼자루를 내 손에 끼었을까?
나는 마흔 이후 무너져 있었다
실패와 체념을 반복하며 벌레처럼 작아졌었다
그런 내게 핏줄과 친구들은 위안이었다
그 위안들이 나와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
그 각성이
그 충격이
그 배신감이
칼이 됐나보다
그렇더라도
그 배신감은 나의 자격지심에서 기인한 왜곡이며
그 충격은 나의 자만이 만든 기만이며
그 각성은 나의 무지가 만든 오판이겠다
친구들에게
여자친구에게
엄마에게
더 관대해지면 이모에게
용서를 구해야겠다
-구운계란 한 알에 소주 한 병 떼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