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표현방식이 다를 뿐
어른들과 아이들의 표현방식이 많이 다름을 느낀다.
얼마 전 급하다는 사장님(사장님이 곧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차를 돌려 사무실로 재차 출근을 했다. 퇴근한 지 20분 정도가 경과된 시간이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몰려드는 업무 덕에 집에 가자마자 침대에 누울 지경이었는데, 초과근무까지라니...
지쳐 흐느적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사무실로 뛰어올라갔다. 그 바람에 바닥에 고인 물을 보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까지지도 않고, 피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몸이 지치니, 마음도 지친 걸까?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
멍도 안 들고, 부기도 없이 멀쩡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뒤늦게 통증이 왔고,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그 통증의 강도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얼마나?”
다 큰 딸이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성격이 급하신 아버지는 답도 듣기 전에 다음 말씀을 이어 하셨다.
“넘어지길 왜 넘어져? 그렇게 높은 굽 구두를 신고 다니니깐 넘어지고 그러지.”
“야무지게 운동화 신고, 딱, 그러고 다녀야지.”
순간 왈칵! 서운함이 밀려왔다.
‘어디서, 얼마나’는 그 나름의 걱정이고 안타까움일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말씀들은 어른들의 서툰 자식 사랑 표현방식 정도로 해두자, 그 순간엔 서운했지만, 아직도 부모 앞에서는 찬찬치 못한,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로 콩이와 까꿍이를 보고 계신 엄마를 지원하기 위해 콩이네로 갔다.
콩이와 까꿍이는 하루 종일 온 거실을 방방 뛰어 다니며 놀아 기분이 업 되어 있었다. 고모가 왔으니 또 다시 리셋 되어 뛰기 시작했다. 고모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콩! 까꿍이! 우리 차 마시며 오늘 뭐하고 놀았나 대화 해볼까?”
하며 식탁으로 유인했다. 아이들은 컵 하나씩 들고 고모를 따라 식탁에 앉았다.
“오늘 어땠어, 할머니랑 재밌게 놀았어?” 라는 질문을 하자, 까꿍이가 답은 하지 않고, 대뜸 나에게 물었다.
“고모, 오늘도 다리 아야했어? 오늘은 아야 안했어?”
까꿍이는 고모의 질문보다 고모가 오늘 다리가 아팠는지 안 아팠는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응. 까꿍이 고모 아야할까 봐 걱정했어?”
“응. 걱정 했어.. 아야 하나 안하나.”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이들은 심플하다. 어른들처럼 아직 원인과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른다. 그 때문일까? 표현에서 심플하고 다이렉트하다. 반면, 어른들의 수많은 생각들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방해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마음과 까꿍이의 마음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도, 까꿍이의 마음도 모두 다리가 아픈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심플하고 다이렉트한 표현방식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조차도 어른들의 반어적 표현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방식으로 서운함을 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반어적 표현 뒤에 더 깊은 마음을 숨겨 놓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