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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ㅡ 성시간(聖時間)



빛이 늦게 깨어나는 저녁,
성전의 문틈으로
미세한 숨결이 스며든다

촛불 몇 개.
그 사이를 걷는 나의 그림자

오늘 하루의 무게가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말할 필요가 없다 —
침묵이 먼저
나를 대신해 기도한다

성체 앞에 앉으면
시간은 느리게 주저앉고
나의 가장 깊은 상처가
흔들림 없이 드러난다

회개는
스스로를 꾸짖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
내 마음을 열어
흘러나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두는 일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묻는다.
왜 오늘도
당신을 향해 나오게 되었는지

그러면
어디선가 아주 작은 대답이 온다

“네가 나를 찾기 전에
이미 내가 너를 불렀다.”

그 한마디에
주름진 마음이
저절로 숨을 고른다

성체 앞에 머무는 동안
나는 조금씩
내가 아니었던 것들을 벗고,
말하지 못한 사랑과
말할 수 없었던 슬픔을
당신의 손에 놓아둔다

성시간이 끝날 때,
나는 언제나 같은 나이지만
또 언제나
조금은 다른 나가 되어 돌아간다

당신과 함께 잠시 머물렀다는
고요한 확신 하나

그것이면
오늘을 견디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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