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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난한 황제 Jan 14. 2021

나의 월급 연대기: 소처럼 일한자 고개를 들어라

가난한 황제 탈출기 #3.

2011년 5월 1일, 스물아홉의 나는 그날이 노동절 인지도 모르고 근로계약을 체결하러 갔다. 간단한 면접을 마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일단은 11개월짜리 파견직이라고 했고, 내가 원하면 최대 2년까지는 쪼개기 계약으로 계속 일할 수 있다고 했다. 파견직이 뭔지 정확히 몰랐고 쪼개기 계약은 더더욱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영화 관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스물아홉의 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고, 여러 공모전에 도전했고, 실망했고, 버텼지만 더 이상 알바를 전전하기에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첫 월급으로 통장에 130만 원이 찍혔다. IMF 때 대학을 졸업한 사촌언니가 첫 월급으로 받았다는 액수와 같았다. 지금의 회사가 나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 대가로 파견회사에 매달 40만 원 씩 내 월급에서 떼어 수수료로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동생과 월 30만 원씩 각출해서 홍은동 낡은 빌라의 월세를 냈고, 공과금을 냈고, 샴푸, 생수, 냉동만두, 쓰레기봉투를 샀다. 그리고 월 30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는데 무려 3년 후 만기 적금을 타게 되며, 그것은 약 10년의 직장생활 중 유일한 만기 적금으로 남게 된다. 역산해보면 쪼개기 계약으로 연명했던 파견직 2년간 월 70만 원으로 살았다는 것인데, 기억이 미화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크게 쪼들렸다는 느낌은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설, 추석, 생일, 어버이날에는 엄마-아빠에게 각각 10만 원씩 용돈까지 드렸다.  다만 그때 내 소원은 핏이 딱 떨어지는 겨울 코트를 사는 것이었다.




더 이상 쪼개기 계약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파견직 2년의 경력을 발판 삼아 계약직 공채 시험을 볼 수 있었고 같은 회사, 같은 자리에 재입사를 했다. 직접 고용 계약직이 되자 파견회사의 수수료가 내 통장으로 들어왔고 복지포인트에 시간 외 근무수당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 시기에 내 사랑 망원동으로 보증금을 늘려 이사를 하면서 2천만 원 신용대출을 받았다. 2년 균등상환으로 매달 85만 정도를 갚아나갔는데, 그것은 약 10년의 직장생활 중 유일한 대출상환 기록으로 남게 된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파견직 젊은이들을 보면 항상 미안했다. 젊고, 체력 좋고, 빠릿빠릿하다는 이유로 나이 든 정규직보다 더 많은 일을 소화하는 파견직 젊은이들은 월급의 상당 부분을 수수료로 떼어야 했으며, 시간 외 수당을, 복지포인트를 받지 못했다. 같은 일을 하는 또래의 정규직들이 얼마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해도 안되며 물어본다고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회사가 필요해서 고용을 했음에도 2년을 꽉 채워 성실하게 일했다는 이유로 잘렸는데, 엄연히 계약 종료이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잘렸다는 표현을 불편해 했다. 내 옆자리 파견직 젊은이가 바뀔 때마다 미안했고, 미안해질 것이었으며, 언젠가부터는 미안함 때문에 곁을 주지 않았고, 차가워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계약직인데 그 미안함이 왜 내 몫이어야 할까를 생각하며 비정규직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기 시작했을 때 무기계약직이 됐다. 더 늦기 전에 우리 회사의 비정규직 문제를 고발하고,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내 나이는 3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고, 20대에 꿨던 꿈을 좇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기에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무기계약직은 말 그대로 무기 징역형을 받은 계약직 같은 거라서 월급은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오를 뿐이었지만 그 즈음 나의 소비습관에 급격한 변화가 생겨버렸다. 막 2년 균등상환으로 신용대출을 다 털어냈는데, 그때부터 생각의 전복이 일어났다. 앞으로 평생 일하고 살 텐데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쓰고 살자는 생각이 날 덮쳤다. 어차피 얼마 벌지도 못하는데 더 이상 아등바등 살지 말자, 오늘의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 나의 소확행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미래를 위해 허리띠 졸라매던 시절에 쓰던 가닥이 있어서 큰돈은 못쓰고 작은 돈을 매일 쓰게 된 것이다.   




2020년 11월 1일 나는 정규직으로 전환이 된다. 월급이 올랐다. 연봉으로 따지면 10% 정도 올랐는데, 직장생활 10년 차에 처음으로 체감하는 인상폭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월급이 오른게 아니라 그동안 받아야할 돈을 못 받았던 것이었다. 정규직과 차별 없이 일했는데, 월급에서는 차별이 있었고, 그게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정규직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무기계약직 젊은이들에게 미안했다. 제일 젊고 머리가 잘 돌아갈 때, 한 인간의 노동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우리 회사에서 보내고 있는 무기계약직 젊은이들에게 미안함은 나의 몫이다. NCS시험도 안 보고 쉽게 들어왔기 때문에 10% 정도의 차별은 감당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규직 젊은이들이 나는 안타깝다. 그렇게 억울하면 정규직 입사시험을 치르고 다시 들어오면 된다는 대기업 인사과 부장님인 사촌오빠가 나는 무섭다. 회사에서 필요할 때 회사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 회사에 기꺼이 와준 우리의 동료들, 오늘도 소처럼 일하고 있는 무기계약직 젊은이들의 소 같은 눈빛이 나는 아프다.




약 10년 전 노동절날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직전의 나에게 여기서 10년 동안 존버 하면 정규직이 될 거야,라고 말해준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대신 10년 후 너는 매달 현금 한 푼 없이 카드로만 살게 될 거고, 엄마 생일에 용돈 드리려고 비상금 대출을 하게 될 거야. 몇 푼 안 되는 월급에 중독되어 시나리오 작가는 포기했고, 서른두 살에 결혼할 거라는 스님 예언도 빗나갔어. 하지만 니 나이는 적당해. 늘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야.



쓰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었지만, 10년 동안 소처럼 일했고, 나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막 카드나 긁어대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긴 변명 같은 이야기로 끝내고 싶다. 읽고있니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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