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먼나무, 관심의 시작, 때
서울에 사는 지인이 전화가 왔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에 빨간 열매가 달린 가로수가 있었는데 무슨 나무냐고 물었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는 나무, 바로 먼나무다. 겨울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먼나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고 제주도 어디에나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먼나무는 정말 특징이 없는 나무다. 잎도 평범하고 눈에 띌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꽃이 화려해서 시선을 끄는 것도 아니다. 초록이 짙은 여름까지는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나무다. 하지만 늦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서 먼나무는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열매가 익어가면서 붉은색을 띄면 멀리서 얼핏 보아도 눈에 확 들어온다. 무슨 나무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강렬한 붉은색 열매로 그 나무를 기억한다. 잎을 모두 떨구어버리고 열매만 남은 먼나무는 붉은색이 더 선명하게 잘 보인다. 가지에 온통 빨간 색 열매가 덕지덕지 달려 있으니 안보려고 해도 안볼 수가 없다.
나뭇잎이 있어도, 잎이 다 지고 붉은 열매만 남아 있어도, 멀리서 보아도 “나는 먼나무“라고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그 동안 지나다니면서 많이 보았을 텐데도, 사람들은 처음인 양 바라본다. ‘저 나무가 무슨 나무지?“ 라며,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기고 궁금증이 누군가에게 기어코 묻게 하고 만다. 관심의 시작이다. 먼나무에 대한 관심은 겨울에 빨간색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기다릴 수 있을 만한 지구력이 있어야, 그 때를 만날 수 있겠지. 일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바심내고 몸부림치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까지 상처를 주던 시절도 있었다. 살아보니 삶에서 가장 어려운 게 기다리는 일이다. 자녀를 기다리는 것, 사춘기의 자녀를 기다리지 못하고 소리지르고 윽박지르던 나는 기다림에 서툰 엄마였다. 시간이 지나니 기다리지 못했던 내가 보였다.
봄 여름에 무성한 잎이 있어도 멋있지도 않고 그리 큰 그늘을 만들어주지도 않는 먼나무가 쓸모 없다고 베어버렸다면 아마도 강렬한 붉은 색을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세계절을 다 보내고 나서 네번 째 계절을 맞이할 때쯤, 사람들은 먼나무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면 다음해에는 열매가 없어도 먼나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