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받지 못한 어린 시절
관자놀이를 따라 손끝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 한 지점에서 작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진다. 뭔가 몽글몽글하게 만져지는 그 부분. 몇 해 전, 어지럼증이 심해 병원에서 뇌 CT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영상 판독을 하던 의사가 물었다.
“장식물은 모두 빼라고 말씀드렸는데, 혹시 머리핀을 꽂고 촬영하신 건가요?”
“아뇨. 머리핀이 아니라, 총알이에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의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 총알이 박혀 있다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일은 내가 여섯 살 때 일어났다.
작은 오름 아래 밭에서 부모님은 고구마 줄기를 다듬고 있었고, 나는 그 곁에서 들꽃을 따며 놀고 있었다. 그때였다. 밭담 너머로 군복을 입은 한 미군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시절, 미군이 꿩을 사냥하러 다니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었다.
‘또 꿩 잡으러 왔나 보다.’
순간,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다음 기억은 흐릿하다. 나를 중심으로 어른들이 둘러서 있었고, 내 손엔 커다란 초콜릿이 쥐어 있었다. 그날 내 기억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아픈 기억도 피가 흘렀는지 어땠는지 더 이상의 기억이 없다.
다음날, 경찰이 상황을 조사하러 집에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뒷마당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아빠 없다고 해라.”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숨는지, 의문을 가져 본 적도 없고 이유도 몰랐다. 하지만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보호받아야 될 아이였는데 왜 그때 아버지가 숨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상처 앞에서, 아버지는 왜 그리 작아졌을까.
나는 미군 부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수술대 위에서 나는 작은 새처럼 몸을 떨었다고 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이 멎을 듯 몸을 떨었다. 결국 의사는 총알을 꺼내지 못한 채 수술을 중단했다.
그렇게 나는 총알과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머릿속의 총알은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편두통이 올 때면 “총알 때문이야”라고 웃어넘기기도 했고, 감정이 폭발할 때면 “나 납중독이라 그래. 머리에 총알 있어서 그래”라며 농담 삼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은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총알에 종종 내 감정을 떠넘겼다. 아이에게 갑작스레 화를 낸 후에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다 총알 때문이야…’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머릿속 총알은 물리적 상처였지만, 내 안에는 더 오래된 감정의 총알들이 박혀 있었다.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어린 날, 말 대신 침묵을 강요받았던 순간들.
그 모든 기억이 ‘보이지 않는 총알’이 되어 내 안에 숨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총알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
말하지 못한 상처, 잊었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아픈 기억, 이유 없는 눈물.
그건 흠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무게다.
가끔 머리를 감다가 손끝이 그 자리를 스치면 잠시 멈칫한다. 아무 느낌도 없다. 그게 더 이상하다. 총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머리를 빗고, 밥을 짓고, 출퇴근하고, 저녁이면 다시 조용히 불을 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상처와 함께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