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는 돈은 아깝지 않아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를
좋아했던 시골 아이들
어렸을 때 책 읽는 것은 가장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였다. 내 기억에 반에서 많은 아이들이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읽으며 보냈던 것 같다. 교실에 비치된 책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들이 가득했다.
어쩌면 현실에서 겪어야 하는 슬픔과 힘든 순간들을 책 속의 세상으로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농촌의 삶은 단조로웠다. 들에서 땔감을 구하고, 지네도 잡으러 다니고 고사리 꺽으러 다니던 일들이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할 땐 아름답고 재밌지만 그때는 별로 재밌는 일은 아니었다. 늘 하는 일이었다. 일상에서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모습들은 아이들을 충분히 책 속으로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책을 발려가기도 하고 읽으며 보냈던 그 시절이 가끔 그리워진다.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해주었다.
내게는 특별한 시간들이 되주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힘을 준 것이 어느 누구도 아닌 책이 되었다는 게 감사하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책을 읽는 시간은 더 많아졌고, 책이 내 상담사가 되었다. 치유의 힘을 주고 마음을 다잡아주는 것도 책이었다.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 책을 읽는 것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책은 최고의 상담사
우울증과 여러 가지 내면의 힘든 것들에 대해 상담받고 싶었지만 가난한 나로서는 상담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상담받을 때마다 40~50분 정도의 시간으로는 쌓인 독이 해소되지 않았다. 뭔가 해결하기보다는 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답답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뻥 뚫리고 숨이라도 편히 쉬어질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책은 최고의 상담사였다. 일단 시간제한이 없었다. 마음껏 위로받고 오래도록 책에 빠져 들어 책 속에서 상담을 받았다. 내가 싫을 때까지. 졸려서 잠을 이룰 수 없을 때까지.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다음 책을 준비했다. 읽고 있는 책을 다 읽고도 다음 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책을 덮는 순간 바로 다음 책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잠깐의 공백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읽지 않은 새 책들이 많았다.
책은 오래된 우울과 무기력으로 인해 활력이 없을 때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을 주었다. 책을 읽는 것이 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이었다.
책을 살 때도 여러 권을 사는 습관이 지금도 남아있다. 집에는 늘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여러 권 쌓여있다.
책의 한 구절에 꽂혔다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었던 어느 여름. 그즈음에는 여행책도 많이 읽고 있었다. 여행을 하며 사색하고 예기치 않은 경험에서 깨달아가는 이야기들이 쏙쏙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에서 위로받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나도 미치도록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하루는 한비야의 국내 여행담을 기록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 한 구절이 가슴에 확 꽂혔다. 화살처럼 날아온 글귀가 내 가슴에 와서는 나갈 줄을 몰랐다.
그 순간 내 고민이 겹쳐졌다. 그렇게 원하면서도 내가 여행을 떠나지 못하던 가장 큰 이유가 아이들 때문이었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물론 돈도 시간도 나에게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돈과 여유가 나의 여행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막내는 7살,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다. 첫째는 4학년, 둘째는 2학년, 셋째는 1학년이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모두 어렸고, 내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어린아이들을 집에 두고는 차마 혼자 여행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것도 며칠 씩이나. 그렇게 아이들에게 붙들려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지금 하라"
한 줄의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줄기의 외침이 들렸다.
'아이들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면 되지'
머리속에서 이 소리가 들려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배낭을 쌌다. 아주 최고로 간단하게. 여행을 떠날 준비가 전혀 안 돼있었지만 그냥 떠나기로 했다. 여행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려면 평생 여행을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완벽한 준비를 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므로. 그냥 입고 있는 옷 그대로, 가방엔 속옷 한 벌과 비누 한 개. 칫솔, 치약, 그리고 뭐가 있었나? 수건 하나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과 떠나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여 학교에 첫 등교한 날이었다. 학교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께 아이들과 여행을 떠나려고 하니 체험학습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사스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시기였다. 교감선생님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는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다.
체험학습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위험하다면서. 그렇지만 나는 많은 학생들이 있는 학교보다 오히려 우리끼리 길을 걸으며 여행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체험학습이 안되면 그냥 결석 처리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오는 데로 데리고 집을 나섰다.
세 아이를 데리고 막내가 있는 어린이집으로 갔다. 어린이집 원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했다. 도보여행을 떠나니 며칠 동안 어린이집에 못 나올 거라고 말했다. 원장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응원도 보태주었다.
"어린이집보다 더 좋은 공부는 세상 구경" 이라면서 잘 다녀오라고 했다. 힘이 났다. 막내는 아침에 어린이집에 등원하던 모습 그대로 원피스에 어린이집 가방을 멘 채로 떠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작하게 된 도보여행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아침까지도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었던 일이었다. 여행을 하고 싶으면 누구든지 지금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책 사는 돈이 아깝지 않은 이유
나는 아무리 가난해도 책 사는 돈은 아끼지 않는다. 굶을 수는 있지만 읽고 싶은 책을 사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 학원은 못 보내도 읽고 싶은 책이 있다고 하면 책 사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는다. 책에서 배운 것들이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는 책을 통해서 배웠고 아이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배우기 위해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있다. 배우기 위해 살고 배운 것을 실천하며 성장한다. 실행할 힘과 용기도 책에서 얻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배움이 책에서 얻는 것들이다. 학교에서도 책을 통해, 배우고 가르치고 하는 과정들이다. 책을 읽는 것은 누군가의 설명을 건너뛰고 직접 그 가르침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어려울 수도 있지만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앞에 이해되지 않던 부분도 이해하게 된다. 또 이미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한다.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아이들과 함께 했던 도보여행이다. 돈이 없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자부한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정말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을 것 같다. 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 미안해하고 자책하는 엄마가 되었을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책으로 도피하는 걸까. 책에서 힘을 얻는 걸까. 책 읽는 시간은 집중과 몰입의 최고의 시간이니 책 사는 돈이 아깝지 않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