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글을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글짓기는 사물을 달리 보는 시선, 감정표현의 예술 감각이 있어야만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떠오르는 문장들을 기록하고 싶어 글을 쓸 때면 그 문장이 완성됨과 동시에 위로받았다. 이런 게 치유의 글쓰기라는 것일까.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들여 내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는 데 첫 소재가 아버지가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
생각해보니 처음인 것이 어울리기도 한다. 모든 것의 발단은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내 마음의 상처도, 동생의 비뚤어짐도, 엄마의 인생도 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거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내 아버지는 교사로 가난한 집 막내아들이었다. 엄마는 은행원으로 여유 있는 집 큰 딸이었다. 엄마는 미팅에서 아버지를 처음 만나 연애한 게 첫사랑이었다. 외할머니는 가난하다고 의사랑 중매결혼시키려고 했지만 주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아버지랑 결혼하면서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못 가고 경주로 갔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돈 한 푼 안 보태줘서 제주도도 못 간 게 아직도 서운하다고 한다. 엄마는 시댁이 가난했어도 아버지가 선생님이고 안정적으로 돈 벌어오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충주에서 근무하며 엄마는 대전으로 매일같이 출퇴근을 해야 했다. 엄마는 주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만큼 셈이 빨랐고 한국은행에 취업하였다. 그 당시 기혼자로 근무하는 여사원은 최초였을 만큼 인정받는 사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지 혼자 벌어도 된다며 그만두라고 성화였다. 결국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주부가 되었다. 엄마랑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지금 다 높은 자리 하나씩 하고 있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엄마는 알뜰히 모아 내가 초등학교 갈 때쯤 아파트를 계약했다. 아빠는 근무를 성실히 했고 자기 일을 매우 좋아했다. 세 살쯤 된 아이의 기억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갔었고 학생들이 나를 예뻐해 줬던 기억이 어렴풋 난다.
아파트 입주가 코 앞인 어느 날 아버지는 상갓집에 다녀오는 길에 음주운전을 했다. 더 문제는 상황은 잘 모르겠으나 아버지 말에 의하면 억울하게 뺑소니 기준에 해당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동생을 들춰업고 내 손을 잡고 피해자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수차례 고소취하를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마는 그 택시기사가 그렇게 매정할 수가 없었다고 한탄했다. 결국 아버지는 교사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꿈의 아파트는 벌금 및 사건 처리비용으로 쓰이고 말았다. 당장 길바닥에 내앉게 생겼던 우리 네 가족은 만삭인 이모네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지금도 이종사촌동생이 속을 썩이면 이모가 임신했을 때 같이 살면서 내 동생을 너무 미워해서 미운 사람 닮은 것 같다고 한다. 동생을 그토록 미워한 이유는 아버지랑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의 힘겨운 인생이 시작된다. 이모네 집에서 나와 가게 된 곳은 물도 새고 쥐도 있는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그때 엄마 나이 고작 서른둘이었다. 궂은일도 한번 안 해본 여자가 녹즙 배달, 유아책 방문 판매 등도 하고 대출받아 가게도 여럿 했다. 업종도 다양하다. 만화방, 음식점, 노래방 그때마다 아버지란 사람은 자격지심에 빠져 술 마시고 당구나 치고 카드도 하고 다녔다. 음식점 할 때 배달하다가 제자 집을 방문하고는 철가방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노래방 할 때는 밤늦게까지 혼자 있는 엄마가 걱정되어서 가보면 손님 하나 없는 노래방에서 혼자 시간 넣어놓고 노래 부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곤 했다. 엄마는 우울증이었을 거다. 보다 못한 할머니가 자리를 알아봐 주셔 아버지는 직장을 잡게 되었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 그만두었다. 단칸방에 같이 자니 아침마다 알람을 맞춰놓으면 아버지는 한 번에 벌떡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로 얼굴은 배게에 묻고 한참을 누워있다 못내 씻고 나갔던 것 같다. 임용고시를 다시 본다고 했다가 공인중개사를 딴다고 했다가 그렇게 엄마는 쉼 없이 일을 하고 아버지는 경제능력을 상실했다.
환경이 자주 바뀌어 이사가 잦다 보니 초등학교 때만 전학을 두 번 해서 세 곳을 다녔다. 그런 환경 속에도 다행히 나는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만화방 카운터 엄마 옆에 앉아 늦게까지 공부했다. 문제집 사기 무섭게 다 풀고 또 산다고 엄마한테 돈을 달라고 했다. 3학년 때는 공동 일 등했다고 집에 와서 울었고 표준전과, 동아전과 다 사달라고 때를 썼다. 나는 인정 욕구가 강했는데 아버지 칭찬을 받고 싶어 노력했다. 아버지는 실로 명필이었고 항상 글씨 예쁘게 쓰라고 말씀하셔서 글씨도 연습해서 늘 학급 서기를 도맡아 했다. 아버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는 노래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을 만큼 노래도 잘해서 나는 아버지께 보이기 위해 합창반에도 들어가고 가족동반 모임을 가면 늘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늘 아들만 찾았다. 나를 낳았을 때 딸이라는 말에 병원에도 안 왔다면서 아들 낳았을 때는 꽃다발도 사들고 왔다고 들었다. 엄마가 보기에도 아들사랑이 유별났다고 한다.
내가 6학년 때 엄마가 주류회사 주부 영업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아버지는 지랄 맞게도 생선, 나물, 국, 잘 갖춰진 밥상이어야 먹는 사람에 음식물 쓰레기만 봐도 토할 것 같다고 설거지도 안 도와주는 사람이었는 데도 엄마는 매일 아침 챙기고 출근했다. 엄마는 사회활동을 하며 조금씩 생기를 찾아갔는데 회사 업무 특성상 회식자리도 많고 집에 늦는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되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남자들도 많은 직장에서 술도 잘 못하던 사람이 술자리도 갖고 하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엄마를 괴롭혔다. 빚은 엄마가 갚아도 갚아도 아버지가 또 만들어댔고 결국 허구한 날 싸워댔다. 아버지는 내가 돈도 못 벌어오고 있으니 한심하냐며 꼴사나운 말을 해대고 싸우다 화를 못 참으면 엄마를 두들겨 팼다. 동생은 울고 나는 달래고 숱한 새벽녘에 우리를 데려다가 이혼하면 누구 따라갈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엄마 따라간다고 말하고 나면 다음날 화해하곤 이튿날 또 반복이다. 언제는 입이 돌아가도록 때리고 언제는 갈비뼈가 부러져 입원하도록 때렸다. 갈비뼈가 부러진지도 모르고 집에서 도망 나와 친정으로 가서 입원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무릎 꿇고 사죄하고 데려왔다. 아니 엄마 발로 다시 왔다. 엄마는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던 것 같다. 혹은 이혼녀라는 꼬리표도 무섭고 우리를 혼자 키울 생각에 막막했을 것이다.
“너네 엄마 아빠 이혼하면 누구 따라갈 거야?”라는 질문에 엄마라고 해놓고는 아버지가 상처 받았을까 봐 내심 걱정했었고 대낮에 소주를 사다 마시며 혼자 울고 있던 아버지 뒷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는 어린 마음에도 마음이 아렸다. 그건 그래도 내가 아버지를 한때는 존경했었고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던 건 내가 맞은 후부터였다. 그 날은 칼까지 집어 들고 엄마는 도망 다닌다고 집안을 뛰어다니고 그러다가 내가 엄마를 두 팔 벌려 막아서며 그만 때리라고 아빠한테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갑자기 별이 번쩍 하더니 따귀를 맞았는 데 그때 아버지 눈빛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었다. 엄마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애를 때리냐며 울부짖고 아버지도 당신의 행동에 놀란듯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싸우던 말던 동생이 울며 내 방 문을 두드리던 말던 문을 잠그고 노래를 최대 볼륨으로 틀고 들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썽을 모두 피웠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꼴찌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정답을 알면 피해서 찍었다. 그럼에도 꼴찌에서 2등을 했을 때 꼴찌 하기도 정말 힘든 거구나 생각했다. 못된 친구들이랑 어울렸다. 선생님에게도 대들었다. 술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서 엄마가 학교에 불려 왔다. 어울리던 무리들은 부모님이 다 먼저 오셔서 가고 나 혼자 복도에 앉아있었는데 엄마가 와서 건넨 첫마디가 “일어나 배고프지”였다. 엄청 혼날 줄 알았는데 담배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고 매점으로 데려가서 햄버거를 사 먹이며 다른 아이들은 몰래 가리고 하는데 딸은 아주 대범하게 하더라고 선생님께 들었다고 했다. 숨기는커녕 나 망가질 거라고 나쁜 아이라고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아빠한테 말했다간 너 죽는다며 비밀로 하자고 했고 화살은 엄마한테 갈 것이 뻔했기 깨문에 나도 입 다물었다. 엄마가 젓가락질을 똑바로 못해서 애들도 이모양 아니냐고 밥상머리에서 매번 잔소리하는 것이 듣기 싫어서 밥공기에 콩을 넣고 옮기는 연습 끝에 고쳐버렸다. 아버지는 엄마를 평생 타인의 눈치 보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건 정말 심한 신체적 , 정신적 학대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여자도 만나는 듯했다. 그것 때문에 엄마가 녹음도 하고 미행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일탈도 심해졌다. 집에 가기 싫어서 가출도 했고 갈 곳이 없어 집 옥상 보일러실에 숨어 있다가 집에 아무도 없는 시간에 집에 들어갔다가 엄마한테 잡혔었다. 장롱 이불속에 동생 교복 산다고 모아둔 돈봉투에서 만원을 훔쳤다가 아버지한테 따귀를 또 맞았다. 나는 엄마한테 아버지랑 이혼하기 전에는 바뀔 생각이 없다고 발악했고 결국 엄마는 내가 열다섯 살 때 혼자가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갈 때쯤 외할머니께서 애비랑 다 정리하고 애들 데리고 살라고 돈을 조금 주셔서 작은 임대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나 친가 친척에게서는 양육비 한 푼 받지 못했고 초기에만 아버지를 두어 번 봤을 뿐 그때도 엄마가 아버지에게 돈을 줬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께서 이 성적으로는 상고도 못 쓴다고 그랬을 때 아버지는 무조건 인문계 가야 한다고 해서 시외에 있는 누구도 알만한 공부 못하는 일명 꼴통 인문계 학교에 원서를 넣어 붙었다. 아버지와 떨어진 후 다시 공부를 조금 하여 국립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합격 발표 나던 날 학교에서 플랜카드를 붙인다고 했는데 어쨌든 칠판에 OOO 축 국립대학교 입학이라고 쓰여있었다. 엄마는 국립대학교 가줘서 정말 고맙다고 울었다. 대학교 때 수업을 듣다가 문득 나도 많이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강히 잘 지내시라고 아버지께 연락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대학생이 되었다고 칭찬받고 싶었던 마음이 내재되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낸다며 불편하니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라는 답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 여자랑 아들 본다고 동생 군대도 찾아가서 방송을 했지만 동생도 만나주지 않았다. 들리는 소식은 자기 자식도 아닌 다른 여자의 자식도 둘이 있다고 했다. 나는 또 상처를 받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 마음먹었고 내가 결혼할 때마저 연락하지 않았다.
내 나이 서른넷 아버지랑 떨어진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는 증오의 마음조차 없어졌고 그냥 어디서 죽더라도 모르는 사람처럼 연락조차 안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짧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 가난했던 집에도 장롱 속에 아버지의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 그 당시에도 아버지가 무척 아꼈던 기억이 난다. 그걸로 오랜만에 삼겹살 배 터지게 먹을 때, 내 방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갔을 때, 할머니가 사준 책상에 우리 남매 둘이 나란히 앉아 책 읽었을 때 등 행복했던 순간에 사진을 찍었었다. 갑자기 그 카메라는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다가 사무치게 슬퍼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안에 이 상처는 언제쯤 아물어지기는 할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죽을 때까지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슬퍼야 하는 것인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내 잘못도 아닌데 내 인생이 이렇게 지워지지 않는 슬픈 시간들로 얼룩져버린 것이.
그림_작은 피카소 이두열. 두 살 때 자폐 판정을 받고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