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에 읽는《백세 일기》

'네, 한번 멋지게 살아보고 싶어요'

by 김열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명절에 내려가서 뵐 때마다 멀찍이서 일기를 정리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검은 모나미 볼펜 한 자루로 작은 공책에 빼곡히 일기를 쓰셨던 할머니. 일기는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백세 일기》의 저자 김형석 교수님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설교를 들었고 윤동주 시인과 같은 중학교를 다닌, ‘살아있는 역사책’이라 불릴 만한 대한민국 원로 철학자이자 수필가이다. 그러한 교수님의 100년 인생이 꼬박 담긴 일기가 있다. 제목만 봤을 뿐인데도 세월 앞의 경건함이 느껴진다.


과거에 비해 우리가 살아갈 거라 기대하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앞으로 살아갈 환경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 더욱 ‘늙어감’이라는 주제에 눈길이 간다. 50대, 60대, 그리고 100세 이후에 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자, 이제 나보다 앞서 걸어간 한 선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 나를 사랑하는 방법, 일기


p.7 일기는 나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머리글에 적힌 맨 마지막 문장이다. 일기 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울림을 주고 깊게 생각하게 만든 문장이라 기록해보았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은 인생이 던져주는 과제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삶을 살아가는 데 정답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길도 있고 인적이 드물어 발자국이 많이 보이지 않는 길도 있다.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는 자기 스스로가 결정하는데, 그때 기준 되는 것들 중 하나가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인가 하는 것이다.


일기 쓰는 시간 동안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고 왜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 상대방에 대해 판단하고 느끼고 있던 생각들을 좀 더 깊게 만나기도 한다. 때론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하고, 어두워만 보이는 현실에 눌린 나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한 나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잠시나마 위로를 건네는 시간이 바로 일기 쓰는 시간이다.


나를 사랑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지금껏 확실하게 발견한 방법은 일기 쓰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님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뿌듯했다 ^^ 나보다 앞서 살아간 선배에게 그 생각이 맞다고 확인받는 시간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기록해두고 싶었던 문장이다!



■ 멋지게 살아가라는 응원과 지지


p.13 한번 멋지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이 책은 총 4부로 나뉘어있다. 1부의 제목이 ‘한번 멋지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이다.


잠시 읽기를 멈추었다. 어디선가 나이 지긋한 백세의 어르신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음성은 절대적인 강요가 아닌 따뜻한 제안이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아’라는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마치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속 깊은 응원과 지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줄 모르고 더 ‘잘’ 살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나이기에 이 문장이 마음에 그대로 와 담겼으리라. 세월을 무기로 강요하지 않으시는 백세 저자의 제안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후엔 알 수 없는 용기가 피어올랐다. ‘멋지게’라는 말이 ‘나답게’라는 말로 들렸다.


지나치게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고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삶. 내가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가는 삶.

그래, 그렇게 멋지게 한번 살아보는 건 어떨까. 인생은 그 자체가 선물이니까!


■ 목적 있는 습관 들이기


p.15 아침 6시 반, 토스트 반 조각


아침 6시 30분이 되면 조반을 먹는다. 아는 사람들은 혼자 지내면서 왜 그렇게 이른 시간에 식사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내게는 이유가 있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도 조찬 모임이 많아지는 추세다. 바쁜 사람들이 아침 시간을 이용해 모임을 갖는다. 나는 그런 모임에 강사로 초청받는 일이 있기 때문에 나름 책임을 감당하려면 습관을 살려둬야 한다.


이른 아침 시간에 매일 같은 식단을 드시는 교수님. 혹시라도 하게 될 조찬 모임 강의를 위해 평소에도 일정한 습관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한다. 일정한 습관을 유지하는 것 자체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습관을 유지하는 목적이 자신에게 주어질 일을 감당할 때 모자람 없이 하기 위함이라는 점이 더욱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을 하든 명확한 목적이 있는 편이 훨씬 좋다는 생각을 했다. 목적이 먼저 서 있으면 하고자 하는 일을 쉽게 그만두지 않는다. 대체로 그 목적은 막연한 것이기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이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미래에 내가 하게 될지도 모를 일에 대비하여 지금의 내가 평소에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아침이나 저녁에 글을 보거나 운동을 하는데, 사실 뚜렷한 목적은 없다. 아직은 그저 좋아서 하고 있다. 뚜렷한 목적을 세우지 않았어도 이 습관들을 꽤나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내 안의 내적인 동기와 열망이 큰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어렵게 들인 습관을 오랫동안 가져가기 위해서는 교수님이 목적을 뚜렷하게 세우셨던 것처럼 나도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p.48 “100세가 되니까 그런 옛날의 꿈은 다 사라진 것 같아요. 지금 바라는 것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을 통해 행복해졌으면 감사하겠어요”라고 했다. 나 한 사람의 행복보다는 독자들의 행복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100세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교수님이 뽑은 가장 귀한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이 책의 이곳저곳에 사랑이 묻어있고 사랑 없이는 사회적 정의도, 물질적 가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대체 나의 행복보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시간이 흘러 더 큰 어른이 되면 나에게로 집중된 시선이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하는 것일까?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두가 넓은 마음 그릇을 가지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p.129 그의 얘기가 나를 약간 놀라게 했다. 자기가 고생하고 있을 때 의사 B가 장학금을 주면서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김형석 선생님이 도와준 것이다. 너에게 주는 것은 김선생을 대신해 주는 것이니까 너도 이다음에 사정이 허락하면 이 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 그 사랑이 여럿을 거쳐 이 젊은이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남는다.


대가 없이 받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한다. 그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옆 사람, 그 사람의 옆 사람으로 움직이면서 각자의 마음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마치 도화지에 붉은 물감이 서서히 번지듯.


교수님이 어렸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사랑을 준 대상이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관심이 분명히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그 사랑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을 내 안에 담는 그릇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넘치는 재료를 가졌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다소 부족한 양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축해두는 재료의 양에는 한도가 없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의 따뜻한 온정을 주고받는 경험을 통해 본래 가진 것에서 배로 늘려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가진 재료를 귀히 여기며 그것으로 나의 마음 그릇을 점점 키워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결국 내 마음의 그릇을 키워가는 일은 오로지 나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함께 사는 사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돌고 돌아 결국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오고 계신 교수님. 일시적인 쾌락으로 연명하는 삶이 아니라 느긋한 행복으로 꾸준하게 채워지는 삶을 살고 싶다. 그 비밀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이미 생생한 선례가 있으니 한 번 믿고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일과 정신의 젊음


p.68 나이는 같아도 늙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신체 나이는 어쩔 수 없어도 정신의 젊음을 유지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p.170 70대가 끝나면서 반성해보았으나 내가 정신적으로 늙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90이 될 때까지는 그 정신적 위상을 지켜보자는 의욕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내 사상이 일을 만들고, 일이 지적 수준을 계속 유지해주었다.


삶에 활력을 돌게 하는 두 가지 바퀴가 있다. 앞바퀴는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 뒷바퀴는 그 배움을 활용하여 주위에 알려주는 것. 그 알림의 형태는 일상생활에서의 대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SNS, 그리고 우리 각자가 속한 직장일 수도 있다.


일은 대체로 괴롭고 힘든 것이지만 관점에 따라 내가 가진 정보나 지식, 재능이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재능은 화폐와의 교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손쉽게 음식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게 한다. 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기업 혹은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일정의 보수를 받고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매일 반복되어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직장에서의 일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나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세가 되도록 활발한 일을 하고 계신 교수님을 보니 살아가는 데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정신이 늙지 않길 원하셨던 교수님은 그 정신 위상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것은 또 다른 일을 만들어 그로 인해 지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계셨다. 일과 정신의 꾸준한 순환이 참 중요한 것 같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는 간단한 진리가 여기에서도 통한다. 배움과 일하는 것으로 내 주위에 꾸준한 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어 삶의 활력을 유지하고 생명을 돌게 하는 일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p.26 강연 주제는 대부분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다. 그분들에게 “90이 될 때까지는 공부하고 일하면서 활기 있게 살아보자”고 호소하곤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 강연할 수 있어 기쁘다. 어려움은 있어도 그분들과 나누는 사랑 덕에 내 인생에도 보람이 있는 것이다.


나도 70, 80, 90이 되었을 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100년을 지나온 일, 사랑, 늙음이 차곡차곡 쌓여 말과 글이 되었다. 그 문장들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 자랑하지 않는 말이고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는 말이다. 선배들을 존경하고 동료들을 세워주며 후배들을 지지해주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향한 따뜻한 시선은 이내 곧 사랑의 향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교수님의 100년 바다를 깊숙이 헤엄쳐 들어갔다가 막 나온 나에게 과제가 바로 하나 주어졌다.


“그럼 이제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싶니?”


‘한번 멋지게 살아보고 싶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으면서도 약간 머뭇거렸다.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사회를 사랑하는 가치를 따를 때 주어지는 힘든 일들을. 이기적인 나는 벌써부터 그것들을 하나하나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본인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이롭게 하는지 알게 되었기에 한 번 힘을 내보고자 한다. 생명이 허락하여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마음 그릇을 점차 크게 만들어야겠다. 그 그릇에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가 담겨, 교수님처럼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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