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리는 것들은 좀 치워볼까
살아가면서 어느 한순간. 지금까지 만들어온 나의 과거와 앞으로 꾸려갈 미래의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세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29세까지의 내 삶에서 부족하게 느꼈던 경력들은 좀 더 채워주고, 33살까지의 내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들은 싹 지울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럼 먼저 나는 돈 문제부터 해결해버리고 싶네. 일단 가장 쉬운 방법은 부모님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초기 세팅하는 것일 테니, 음... 재벌가까지는 너무 부담스럽고 적당히 돈 좀 있는 집안으로 가정환경 초기 세팅 완료. 금수저라고 사회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으니 부모님 배경 말고 내가 가진 것들도 좀 만져봐야겠다. 일단 직장은 제외해야지. 원래부터 재력이 넘치는 집안이었으니 이를 기반으로 성공한 투자가나 사업가로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야겠다. 그런데 비즈니스도 나 스스로 하면 힘드니까 몇 명 정도 고용해야겠다. 숨겨진 에이스들을 발탁해서 자산관리자 이자 개인 비서로 채용해야겠군. 돈 문제는 이쯤에서 두고, 사람 문제를 만져볼까. 우선 내가 원하는 대로 가족들 성향을 다 바꿔두고, 애인, 친구들, 직장 동료들한테서 평소에 내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들을 좀 고쳐줘야겠다. 내 기준대로 다 바꿀 수 있으니까 나랑 가장 잘 맞게끔 설정값을 바꿔주면 같이 지낼 때 괜한 다툼이나 오해가 없겠지. 싸우는 일도 없고 말이야. 아주아주 평화롭겠다.
...?!
여기까지 써 내려가다가 문득, 너무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부, 권력, 인간관계들이 나를 맞춰서 돌아간다니... 그저 처음에 삶을 리셋할 수 있는 기회를 떠올렸을 때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은 그야말로 장밋빛 삶이 펼쳐졌었는데, 막상 삶의 구체적인 영역들이 내가 설정한 값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겁이 난다.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심지어 가족까지도 내 성향에 맞게끔 설정해두었으니,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나에게 솔직해지지 못하겠지? 내 성향에만 맞춰진 친구들을 보는 것도 너무 이상할 것 같아... 나랑 똑같은 말, 똑같은 생각만 하는 사람들만 만나게 된다면.? 재미도 없을뿐더러, 우리들의 관계에서 발전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섬뜩하군...!
“앞으로 10년 동안 어떻게 변화할지 많은 이들이 묻는다. 구태의연한 질문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 무엇인지 왜 묻지 않는가.”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했던 말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사실은 정 반대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아니 해결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오히려 문제의 중요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질문을 바꿔볼까.
‘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택한 채로 태어날 수 없는가?’가 아니라, ‘100%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환경이, 이 세계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내가 바라지 않은(다른 사람이었어도 원하지 않았을) 나의 가정환경, 일어나서는 안됐었던 그러나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고통의 사건들, 나 혹은 상대방의 잘못으로 일어난 수많은 비극들.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투성이인, 나를 둘러싼 이 세계가 진정 나에게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일지.
나 스스로 어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사람은 겸손해진다. 애쓰고 노력해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사건들. 내가 수고함으로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 할지라도 이내 곧 이전으로 돌아가버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나 그것이 사람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더욱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하지 말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가령 회사 동료와 업무적으로 부딪혔다면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자신의 마음부터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고, 상대방과 관계 개선을 위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등 실제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한 번의 노력으로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돌아보면 그 문제는 다시 내 옆에 앉아있고 애써 해결해보려는 나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져서 스스로 좌절하고 상대방을 미워하게 된다. 이런 문제의 반복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면 이렇게 해보겠다.
우선 내 입맛대로 바꿀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본다. 상대방의 태도나 말투, 성격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일단 그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자. 무례하게 뱉고 간 무거운 말들도 일단 내가 사는 앞마당에 던져졌으니 주섬주섬 담아두겠다. 그리고 나서 태워서 없애버릴 것과 남겨둘 것을 분리해본다. 태워버릴 것은 그 사람의 감정적 표현. 남겨둘 것은 진짜 나를 위해서 한 말들. 알맹이가 아닌 것들은 다 태우는 게 원칙. 그리고 시간을 좀 갖고 그것들을 바라보자. 아까보다는 조금 호흡이 느려진 것 같고, 상대방보다 상황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그리고 벌어진 이 일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이 때는 비판과 비난이 아닌 오로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생각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혹,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없었을까, 그 과정에서 미숙하게 반응한 내 태도는 없었을까, 별거 아닌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주어진 환경들에 100%, 120%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삶에 대한 만족은 행복과도 연결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지 궁금해졌다. 기사를 찾아보니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의 세계행복보고서에 보고된 내용으로, 행복지수는 국내총생산, 기대수명, 사회적 지지, 자율성, 부정부패, 관용 포용력, 삶의 만족도를 토대로 산출하는데 한국은 조사대상 95개국 가운데 50위, OECD 37개국으로 좁혀보면 35위로 꼴찌 수준이라고 한다. 나를 비롯해 썩 행복하지 않은 우리들이라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억 세계인 중 나에게 찾아온 몇 명의 사람들, 수많은 일들 중 나에게 맡겨진 몇 개의 일들. 그것들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한 가지 더 터득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