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흔적과 오늘의 나
추억의 증거들이 쌓여간다
밤 사이 비가 내렸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어두운 새벽이었다. 밖을 내다보니 구름이 자욱하게 끼어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흠뻑 젖어있는 길을 걸어본다. 쉴 틈 없이 내린 비는 거리에 선명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어린아이와 놀아주고 온 엄마의 손목에 머리끈이 메어져 있었다. 탁 트인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선명한 파란색 위로 은은한 광택이 덧입혀진 푸른 빛깔의 머리끈이었다. 어린아이 머리숱을 한 줌 쥐어 묶으면 딱 맞을 것 같은 길이였다. 엄마의 손목에는 어린아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옛 사건들이 떠오른다. 걸음의 수가 많아질수록 생각의 깊이도 깊어진다. 아픈 기억들을 저 멀리 떠내려 보낸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눈치채지 못한 사이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 기억은 돌고 돌아 결국 나를 찾아냈고,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나는 내 마음 한구석을 내어주고야 만다.
열렬한 아침의 태양이 뜨면 비에 젖은 길은 금새 말라버릴 것이다. 지그시 밟으면 바삭한 소리가 날 것 같은 메마른 낙엽들이 비의 흔적을 눈치채지 못하게 도와줄 테다. 어린아이 머리끈은 손목에서 빼버리면 그만이다. 그로써 엄마가 누구와 있다 왔는지 알 길이 없어졌다.
사건은 기억으로 남고, 기억은 마음에 흔적으로 남는다.
마음의 흔적을 지워낼 수 있을까.
아픈 그날의 시간들을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그날의 사건들을 자꾸만 되새겨 보는 이유는, 아직 미련이 남은 탓일까 점점 잊어가는 과정이라 그런 것일까. 잊어가는 과정이라면, 과거를 반복적으로 상기하는 일을 얼마나 반복해야 나 스스로에게 충분하다고, 이제 그만 됐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밤 사이 내린 모든 빗방울을 마르게 하는 해가 떠오른다. 무서운 생명력으로 땅 위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태양의 기운. 흠뻑 젖은 땅의 눈물을 마르게 하고 말끔한 얼굴로 닦아 내주는 이 아침의 햇살과도 같은 것들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깊은 시간 일지도,
한 송이 꽃 일지도,
우연히 마주한 문장 일지도,
생각지 못한 만남 일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일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추억의 증거이다.
고통스러웠든 행복했든 각자의 모습을 하고 나와 함께 숨쉬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들은 처음 있던 모습 그대로 머물러있지는 않다. 깊은 고통의 모습은 옅어지기도 하고, 가장 행복하다고 여겼던 기억은 다른 행복한 기억에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 주어질 만남과 사건들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아프게 남은 흔적을 조금이라도 옅어지게 해 줄 우연한 만남이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따뜻함으로 남게 될 오늘의 흔적들을 기대해 본다. 그 따뜻함이 쌓여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면 더 좋겠다. 의미있는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날로 아름다워질 내 모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