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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Nov 01. 2019

11월의 메모를 새로 만들었다.

11월이 달갑고 무르고 싶고 환영하면서도 반품은 안 되나요..

11월의 메모를 새로 만들었다.

1-4월의 기록 이후 5월부터 꼬박꼬박 다달이 하나씩 메모를 만들어 채웠다. 어떤 달은 글이 무척이나 안 써졌다. 나는 못하는 건 보통 싫어하기 때문에 그 달의 글은 키가 작았다. 미움이 많은 기간이었다. 기쁨이나 호기심이나 허탈함이 많은 이후의 달들에는 글자가 계속 들어찼다. 오래된 핸드폰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활자가 자꾸 손가락보다 한참이나 뒤쳐졌다. 길고 긴 스크롤을 내려 월말을 지낼 때에는 답답함에 빨리 다음 달 메모를 만들고 싶어 진다.
이런 연유로 글감이 떠올랐는데 그때가 10월 31일 오후 11시 37분이길래 그냥 참았다 이제야 메모장을 띄운 것이다. 이따가 좀 더 쾌적하고 비어있고 넓고 갓 태어난 메모장에 쓰고 싶었다.

뭔가를 시작하는 마음은 늘 살짝 들뜬다. 맥주를 딱 한 캔만 마신 저녁 식사라든지 소주를 둘이서 병만 나눠 먹고 은은하게 취해 선선한 밤거리를 걷는 기분과 닮았다. 사실 현실의 나는 11월을 기다리면 안 됐는데. 은은하게 취하기에도 좀 가난한데. 돈도 애인도 약속도 일도 없는 채로 지난달을 기념하는 카드값 결제일과 전세이자납입일이 다가오는데. 또 이렇게 별로 이룬 것 없이 2019년의 끝자락에 빼도 박지 못하게 들어섰는데.

시간 가는 속도가 배고픈데 안주 흡입할 때 급이야

그래도 여전히 생각은 많지만 철은 없고 놀 궁리에서는 부자인 나는 제철이 푸짐한 11월이, 단란할 일이 많은 연말이, 추워서 따뜻한 겨울이 좋다.

이 마르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숫자가 또 훌쩍 가는 동안 여기 어떤 문장들이, 어떤 사람과 추억들이 다녀갈지 한 치 앞도 엄두가 안나는 남은 인생을 기대하며 손바닥을 비비고 입맛을 다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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