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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Nov 04. 2019

무리한 초대 아카이빙

오래도록 보거나 수집할 수 없었을 지인들의 글자를 보관하게 되었다.

베개커버 끝이 벗겨져 있다. 방금 다녀간 사람이 그런 건지, 그전에 다녀간 사람의 흔적인 지 알 수 없다.
이번 주는 집에 지인을 초대하는 약속이 많았다. 혼자 사는 너른 집에 퀸 매트리스와 빔프로젝터를 들였다 호기롭게 여기저기 입을 놀린 결과로.
굳이 멈춰 서서 쉼표를 찔러주기 전까지는 허공만 보고 가다 넘어지곤 하는 나에게 마침 수빈이의 전화가 걸려왔다.
약속이 많은 이번 주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최근 쑥주 프로젝트에서 나는 나태한 녹두였다. 타락하거나 재적 위기에 놓인 녹두. 대학 때도 이런 식으로 서서히 학점을 망쳤던 것 같은데.
엎어져 사람 만나기 바빴던 내게 수빈이가 일침을 가했다. 그의 통화가 속까지 깊게 들어차는 단비가 되어줄 것이라는 걸 알았다.
혼자는 도무지 건져날 수 없는 사람처럼 친구의 목소리에 잔뜩 매달렸다. 나의 우울과 걱정과 엉망인 일상을 투덜투덜 털어놨다. 함께일 때는 맑은 헛소리로 쉴 새 없이 혀끝을 놀리던 우리가 떨어지고는 반창고를 붙이듯 서로를 보듬는 방법이었다. '흠 그 와중에 이번 주에 약속까지 많아버려? 그럼 그거 어때 다헤야 무리한 초대 아카이빙.'
무리한 초대 아카이빙. 세 어절이 모두 마음에 들어 웃음이 터졌다. 그게 뭐야. 너무 내 취향이다 수빈아.
방명록을 만들어 방문한 사람들의 기록을 남기고 더하여 뒷정리 노동요까지 추천받기로 했다.
쟤 머리에서는 가끔 어떤 류의 상큼함이 터졌다. 겨울맞이 귤이라도 머릿속에 잔뜩 숨겨놓은 게 분명해.

좋아하는 게 많고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지내고 나서 적은 글자들을 모으는 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후 매트리스와 빔프로젝터를 실컷 누린 방문객들에게 작은 노트를 건넸다.
그들이 내 책상에 앉아 글씨를 꾹 꾹 눌러쓰고 핸드폰을 뒤져 추천곡을 찾는 것을 보는 일은 생각만큼이나 뿌듯한 일이었다.
어쩌면 오래도록 보거나 수집할 수 없었을 지인들의 글자를 보관하게 되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함께했던 흔적을 사진으로 남겨다. 혼자 남아 집을 치우면서 추천곡을 들으니 외로움이 쉽사리 나를 삼키지 못다.
나 여전히 좀 정신없고 삐끗대지만
그런대로 잘 정신없는 법,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삐끗대는 법을 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쑥스러운 감사와 만연한 애정을 느낀다. 자주 비척대지만 그럼에도 일상을 일상으로 살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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