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다름이 다른 반응을 만드는 이유
누구나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나와 전혀 다른데 이상하게 끌리는 사람.
말투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데 자꾸 눈이 간다.
그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조금 넓어지는 느낌이 든다.
반대로,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함께 있으면 묘하게 불편한 사람.
대화를 하면 어딘가 거슬리고, 그 사람의 어떤 면이 자꾸 신경 쓰인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데, 몸이 먼저 반응한다.
둘 다 '나와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왜, 반응은 정반대일까.
심리학자 아서 아론(Arthur Aron)은 인간에게 자기 확장 욕구(Self-Expansion)가 있다고 했다.
자기 세계를 넓히고 싶고, 새로운 감각과 관점을 흡수하고 싶은 본능.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라는 영역을 확장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다름이 내가 원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것을 건드리면 끌린다.
평생 신중하게 살아온 사람이 직관대로 거침없이 사는 사람에게 눈이 가는 건, 상대가 멋져서만이 아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가 공명하는 것이다.
상대의 다름이 나의 가능성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끌림이라고 부른다.
이때 감정의 방향은 확장이다. 설렘, 호기심, 약간의 부러움.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가 더 넓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 감정은 가볍지만, 실은 꽤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칼 융(Carl Jung)은 이것을 '그림자(Shadow)'라 불렀다.
우리는 자라면서 자기 안의 어떤 부분을 '나쁜 것', '있으면 안 되는 것'으로 분류하고 억누른다.
부모에게 혼났던 감정,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았던 욕구,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낀 면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의식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억눌린 것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며 살고 있으면,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올라온다.
예를 들어, 자기 욕구를 표현하는 것을 이기적이라 배우며 자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 앞에 자기 욕구를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논리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짜증이 난다. 경멸이 올라온다.
"왜 저래" 하는 판단이 자동으로 작동한다.
그건 상대가 틀려서가 아니다.
내가 평생 누르고 있던 뚜껑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가 '나'에서 추방한 부분을 버젓이 살고 있고, 그 광경이 나의 억압 시스템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때 감정의 방향은 수축이다.
짜증, 판단, 거리두기.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좁아지는 느낌.
이 감정도 가볍지 않다. 실은 아주 오래된 곳에서 올라온다.
정리하면 이렇다.
끌리는 다름은, 내가 원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것을 비춘다.
상대가 나의 가능성의 거울이 된다.
거북한 다름은, 내가 갖고 있지만 금지한 것을 비춘다.
상대가 나의 그림자의 거울이 된다.
반응을 결정하는 건 상대의 속성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것이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느냐의 차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현상이 생긴다.
한때 거북했던 사람이 어느 날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
이건 상대가 변한 게 아니다.
내가 내 그림자와 화해하기 시작한 신호다.
금지했던 것을 조금씩 허용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위협이 아니라 동료처럼 느껴진다.
끌림과 거북함은 고정된 감정이 아니다.
내가 변하면, 반응도 변한다.
여기까지가 심리학의 설명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고 싶다.
모든 거북함이 그림자는 아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누군가를 불편해하는 감정 뒤에 자기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경우가 분명히 많다.
"저 사람이 싫어"의 끝을 따라가면 "나는 왜 저렇게 못 하지"에 도착하는 경우.
이럴 때는 상대를 판단하기 전에 나를 들여다보는 게 맞다.
하지만 때로는 거북함이 전혀 다른 곳에서 온다.
누군가가 내 삶의 방향을 함부로 부정할 때, 내가 두려움을 감수하고 선택한 길을 "하지 마"로 덮으려 할 때, 그때 올라오는 불편함은 그림자가 아니다.
그건 내 서사를 지키려는 건강한 경계다.
나는 나의 상처를 글로 쓴다.
나의 인생을 정리하고, 나의 철학이 나온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쓴다.
이것을 누군가는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만두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걱정이 진심일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이 없어서 쓰는 게 아니다.
두려움을 안고도 쓰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 선택을 가볍게 부정당할 때 불편한 건 내 안의 금지된 욕구가 흔들려서가 아니라, 내가 지키는 것이 건드려져서다.
그러니 거북함 앞에서 물어야 할 질문은 두 개다.
저 사람이 드러내는 것 중에, 내가 금지한 게 있는가.
아니면 저 사람이, 내가 지키는 것을 건드리고 있는가.
첫 번째라면 나를 들여다볼 일이다.
두 번째라면 나를 지킬 일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성찰해야 할 때 방어하고, 방어해야 할 때 자기를 의심하게 된다.
끌림도 거북함도, 결국 내 서사의 한 장면이다.
중요한 건 그 장면 앞에서 내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다.
그 질문의 방향이 내가 누군가를 향해 돌을 던질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한 겹 더 이해할 사람인지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