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된다고 느낀 날

안도의 공포

by 꾸더칸

흉부 엑스레이 사진 속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의사가 말했다. "어른 주먹 두 개 크기입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다. 이제 그만 해도 되는구나.

그 안도가 나를 가장 무섭게 만들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아들은 놀이터에서 놀지 않았다. 놀이터 앞을 지날 때면 항상 다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다가가지 않았다. 가서 놀자고 하면 "우리 집이 아니니까 안돼."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놀이터는 항상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고, 우리 집은 그 밖에 있었다.


아이의 그 말 한마디가, 나의 결핍을 정확하게 찔렀다. 나의 결핍이 아이에게 그늘을 만드는 것 같은 죄책감이 늘 따라다녔다. 초등학교 올라가면서 아이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S의 회사 근처로 이사를 했다. 출퇴근 시간이라도 좀 아껴보자는 생각이었다. 조금 무리를 해서 아파트 월세를 얻었다. 서울 빌라에서 경기도 아파트로 가니 그렇게 큰 무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남편도 취업을 해서 돈을 보태니 저축도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사 1년 만에 퇴사했다. 코로나가 덮쳤고,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남편 혼자 버는 최저임금으로는 매달 마이너스였다. 저축을 해도 부족한데 저축을 까먹으며 사는 시간은 너무나 불안했다.


코로나에 집값은 치솟았고 2년 후에 이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2년을 연장했다. 집주인은 오른 시세대로 세를 못 받으니 큰 선심을 쓰는 행세를 했다.


3년을 집에 갇혀있는 동안 너무나 갑갑했다. 아니, 갑갑한 게 아니라 불안했다. 하루 종일 집안일과 아이 교육으로 바빴지만, 지금 돌아보니 일부러 바쁘려고 했던 것 같다.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자책은 늘 나를 괴롭혔으니까. 남들은 취미를 부업으로, 직업으로 삼는다는데 나는 그 흔한 취미 하나가 없었다. 그런 내가 한심했다. 그렇다고 뭘 배우려고 하면 학원비가 너무 비쌌다. 돈도 못 버는 주제에 학원비로 몇 십만 원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코로나로 인해 상권이 죽었다. 근처에는 알바 자리도 없었다. 슬슬 이사를 해야 할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로 이사를 해야 하는지, 더 싼 곳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마침, 베프 M언니가 나에게 제안을 했다. 본인 소유의 빌라에 와서 살면 어떠냐고. M언니가 예전에 살던 집이라 나도 가 본 적이 있는 집이었다. 우리 식구가 살기에 넉넉한 집이었다. 위치도 무려 서울 한강변이었다. 당시는 세입자가 살고 있었으나 계약만료가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M언니의 호의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서울로 가면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는 회사에서 알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하지만 간절한 기대였다.


작은 보증금에 월세도 저렴했다. 집 상태는 썩 좋지 않았지만 한강변에 있어서 운동도 할 수 있고 위치도 좋았다. 설령 다 안 좋아도 나에겐 감지덕지한 집이었다.


아들은 5학년 올라가면서 전학을 해야 했다. 전 학교에서 4학년을 너무나 재밌게 보낸 터라 떠나면서 많이 울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남편은 3년간 서울로 출퇴근하느라 매일 새벽에 일어났는데 아침잠을 더 잘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사는 우리 세 식구에게 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이사가 다시 시작하는 발판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일자리가 필요한 나는 아는 회사에 나를 팔았다. 예전부터 나를 영입하고 싶어 했던 회사인데 점점 매출이 줄어드니 직원을 줄여 업무량은 많아진 상태였다. 나는 패션업의 전반에 걸쳐 경험이 있었다. 나를 계약직으로 쓰면 여러 사람의 일을 동시에 도와줄 수 있으니 일반 알바보다는 효율적임을 어필했다. 성수기에만 고용하라고 했고, 근무시간도 하루 5시간으로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방학에는 쉬고, 출근도 아이가 등교하는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는 4년 만에 다시 출근할 생각에 설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치 책상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생애 처음 건강 검진을 받기로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2년에 한 번 건강 검진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중국에 가기 전에는 의무적 건강 검진 제도가 없었다. 귀국한 후에는 일에 빠져 사느라 건강 따위는 돌볼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하필, 이 모든 게 겹쳤다.

그렇게 생애 첫 건강 검진을 하루 앞둔 날, 남편은 3년을 넘게 다닌 회사에서 해고됐다. 사장과의 사이에 쌓인 오해가 터진 것이었다. 약간의 몸싸움이 발생할 뻔했고, 남편은 전화로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했다. 놀라서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확한 상황 파악 없이 신고를 할 수는 없었다. 그 회사의 사장은 M언니의 지인이었다.


남편은 술담배도 안 하고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이다. 한국말을 못 하기에 이직을 못하고 근속을 했을 뿐인데, 사장은 그걸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떠나지 못할 사람이니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나도 억울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얽힌 관계가 문제다 보니 내가 나설 수도 없었다. 게다가 중간에 M언니도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사장에게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진짜 해고를 한 건지, 홧김에 그만두라고 한 건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집에 있는 남편을 보니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다음날 건강 검진도 취소하고 싶었지만, 미루면 또 숙제가 될 것 같아 그냥 빨리 해치우자 생각했다.




검진도 암검진을 제외한 일반검진뿐이었다. 수면 마취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내시경도 하기 싫었다. 그렇게 30분 만에 끝난 검진. 1주일 후에 우편으로 결과가 도착했다. 대수롭지 않게 봉투를 뜯었다. 결과지를 보다가, 이상한 말을 발견했다. 흉부 엑스레이 검사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었으니 진료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사진도 첨부되어 있지 않은 이 한 줄은 나를 굉장히 신경 쓰이게 했다. 분명 별거 아닐 텐데,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꺼림칙했다.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했다.


이 검진 결과지가 도착할 때까지 남편 회사에선 연락이 없었다. 나는 M언니에게 얘기했고 언니는 같이 분노해 주었다. 그러나 며칠 후 연락이 온 언니는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사장이 그럴만했다는 입장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언니의 입장도 이해는 됐다. 하지만 그 순간,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난 남편보다 더 화가 났다. 성실하게 일한 남편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나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하지만 무능한 나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퇴사사유를 해고로 적어 달라는 부탁 밖에는. 그렇게 남편의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며칠 후, 예약한 날이 왔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 주었다. 폐 밑에 무언가 커다란 형체가 있었다. 복부 CT를 촬영했다. 의사도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이상 물체이고 어른 주먹 두 개의 크기라고 했다.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멍하니 듣고 있다가 딱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암.. 인가요?"

"암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 가서 검사받아 보세요."


소견서와 CT 자료를 챙겨 나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세상이 멈추고 나 혼자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의지로 걷는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릿속도 멈췄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암일 수도'가 아이라 '암이 아닐 수도'였다.

사형선고인가. 드라마에서는 막 울던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의 끝은 이런 건가. 이제 그만할 수 있는 건가. 드디어..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안도가 됐다.

그 안도가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그러다 곧 아들이 생각났다.

그 아이는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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