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준비 속에 '나'는 없었다.
살기로 했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수술 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이유를 꺼내봤다.
아이. 아이. 아이… 거기까지였다.
'내가 살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끝내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내 가슴속에 뭔가 커다란 게 들어있다는 걸 확인한 날. 그날 밤, 아이가 잠든 옆에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죽어도 된다고 느낀 내가 무서웠다.
나는 진심으로 치료하지 않고 그냥,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는 게 참 힘들었다. 그리고 점점 더 힘들어졌다. 사라지고 싶은 날이 너무나 많았다. 사고가 닥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 상상이 두렵지 않았다는 게, 더 두려웠다.
하지만 아직은 아들이 어리다. 성장기에 엄마가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병원에 누워 있더라도 엄마의 존재는 필요하다. 난 나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엄마다.
치료를 해서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아직은 일어나야 했다. 그 '이유' 안에 나는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M언니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했다. 언니는 나보다 더 걱정을 했다. 빨리 대학 병원에 예약을 하라고 보챘다. 하지만, 2주 후면 아이가 방학을 하고, 바로 여름휴가를 갈 예정이었다. 물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코로나로 몇 해 동안 물놀이를 잘 못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바닷가로 성수기 전에 일찌감치 다녀올 생각이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름휴가인데, 다녀와서 진료를 보고 싶었다. M언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나무랐다.
첫 진료에서 당일 검사만 세 개, 예약 검사는 다섯 개였다. 의사의 눈이 빨랐다. 간호사에게 검사 일자를 당기라고 재촉했다. 내 가슴속 이물질의 크기가 그만큼 '비범'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휴가는 모두 취소해야 했다. 아이에게 취소 이유를 설명했다. 5학년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아파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지만 바닷가를 못 가게 된 아이는 많이 실망했다. 대신 한강 수영장에 가자고 약속했다.
조직 검사는 입원을 해야 했다. 보호자 1인이 동반해야 한다. 엄마는 고령이시라 충격받으실까 두려웠고, 형제들은 이런 일을 알릴 만큼 가깝지 않았다. M언니가 보호자를 자처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줄까 싶을 만큼 언니는 나에게 잘해줬다. 언니가 있어서 정말 든든했다. 이때만 해도 친언니보다 더 가까운 사이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가족 중 누구 한 명에게는 소식을 알려야 했다.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랑 가까운 사이도 아니지만, 난 어릴 적부터 정신적으로 오빠에게 많이 의지를 해왔었다. 담담히 얘기하고 싶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오빠는 말을 잊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좌로 100만 원이 입금됐다. 오빠는 벌이가 없었다. 비상금을 털었다는 걸 알았다. 뒤따라 온 메시지 한 줄이 나를 무너뜨렸다. '맛있는 거 사 먹어. 이거밖에 줄 게 없다.’
혹시나 가족들에게 아프다는 얘기를 하면 병원비를 구걸하는 것 같아 싫었다. 나이 50이 되도록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내가 창피하고 비참했다. 그런데 오빠의 메시지는 ‘병원비에 보태라’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따뜻함에 마음이 더 약해졌다.
조직 검사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피부에는 마취를 했지만 가슴에 쇠 막대를 박아 넣는 건 화살을 꽂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대롱 안에 가느다란 집게를 넣어 조직을 채취하는 방식이란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가슴에 빨대 하나 박혔을 뿐인데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얕은 숨을 끊어 뱉으며 내가 화살 맞는 귀한 체험을 하는구나 싶었다.
집게로 조직을 채취하는 순간은 가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느낌이었다. 실제로는 아주 작은 조직을 떼어내는 것이었을 텐데, 그 충격의 울림은 총을 맞는 것 같았다. 10여 차례나 총을 맞고서야 검사가 마무리됐다.
병실로 돌아온 나는 가슴 위에 커다랗고 납작한 돌덩어리를 올려놓고 꼼짝없이 4시간을 누워있었다. 가슴에 난 구멍이 좁아질 때까지 그렇게 기다려야만 했다.
다음날 이어진 PET CT는 전신에 암세포 반응을 보는 검사였다. 이 검사에서 전이 반응이 없어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조직 검사에서 암세포가 나오고 전이 반응도 있다면 수술은 못하고 바로 항암치료로 들어간다고 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퇴원했다. 그로부터 다시 의사를 만나기까지 2주의 시간은 길었다. 살면서 가장 초조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초조함의 방향이 나를 향하지 않았다. 수술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 아이와 남은 여름을 다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걱정이었다. 방학을 한 아들과 열심히 수영장에 가서 놀았다.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했다. 이렇게 진심으로 아들과 놀아 준 적이 있나 싶었다.
내 운명이 의사의 입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속 바람은.. 반반이었다.
M언니는 진료에도 항상 함께해 줬다.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에 나보다 더 기뻐했다. 1주일 후 수술 날짜가 잡혔다.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기에,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종양의 크기가 커서 내시경을 이용한 흉강경 수술이 아닌, 개흉수술을 진행한다고 했다.
그것도 정중앙 가슴뼈를 절개한다고. 목 아래, 쇄골 사이에서부터 명치까지 절개. 뼈가 붙고 회복하는데 3~4달, 흉터는 목부분까지 남는다고 했다.
순간 뼈를 자르는 전기톱이 떠오르며 등골이 오싹했다. 젊은 시절, 대학병원 정형외과에서 의사들의 논문수발을 들며 익숙하게 보았던 수술 사진들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나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고 의사는 귀찮은 표정이었다. 대학병원 의사들의 관심사는 생명에 지장이 있느냐 없느냐인 것을 알았다.
수술을 기다리는 일주일 간 내가 할 일은 매일 한 시간 이상 걷기였다. 가장 더운 8월 초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뛰었다. 마침 러닝을 시작한 지 두어 달 된 때라 걷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오직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아이 곁으로, 빨리.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몇 달 동안 머리 손질은 할 수 없을 테니. 아이와 수영장을 두 번 더 갔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니. 끝으로 9월부터 출근하기로 했던 회사에 연락했다. 출근할 수 없다고. 이 한 주 동안도 나를 위한 시간은 한 줄도 없었다.
아들에겐 수술에 대해 숨김없이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내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볼 것이기에 사실대로 얘기했다. 아이는 눈물을 보였지만 의젓하게 받아들였다.
남편에겐 수술만 하면 되는 일이니 걱정할 것 없고, 내 대신 아이를 잘 돌봐 달라 부탁했다. 마침 아이는 개학을 했고, 남편이 실직 상태인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7일 정도의 짐을 챙겨 입원했다. 변함없이 M언니와 함께였다. 친화력이 좋은 언니는 5인실을 함께 쓰는 다른 환자, 보호자들과 금방 친해졌다.
나는 별로 그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수술이었다. 수술 예정 한 시간 전, 나를 수술실까지 태워갈 베드가 병실에 도착했다.
좁은 베드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몇 초 만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베드는 움직였고 병실 안의 사람들이 “수술 잘하고 오세요.”라고 한 마디씩 건넸다. 그 말들이 다른 세상의 소리처럼 들렸다.
베드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오는 언니의 타박이 들렸다. “너는 왜 어르신들한테 대답을 안 하니.” 나는 눈물을 삼키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언니는 나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언니와 헤어지고 수술실까지 한참을 이동했다.
나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베드 이동해주시는 분이 수술 전에 많이 울면 좋지 않으니 진정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울면서도 내가 왜 우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베드가 수술 전 준비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홀에 수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실은 베드가 줄을 맞춰 배열되어 있었다. 싸늘한 온도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눈물이 멈추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곳에서 수액을 달고 수술 설명을 듣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폭이 50센티 정도 되는 좁은 수술베드로 다시 옮겨졌다. 그리고 잠시 후 잠이 들었다.
신음으로 잠에서 깼다. 극한의 통증이었다.
그런데 낯선 부위였다. 앞이 아니라 옆구리.
당황스러움과 안도가 동시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