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독했던 병실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통증으로 의식이 돌아왔다.
'아! 옆구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슴뼈가 아니었다.
신음과 함께 안도가 새어 나왔다.
계획과는 다르게 가슴뼈를 절개하지 않았다. 수술 방법이 왜 바뀐 건지 이후에도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름에 터틀넥을 입지는 않아도 되는구나!' 이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난 땀이 많아서 겨울에도 터틀넥을 입지 않는데, 어이없게도 이 와중에 그게 스트레스였나 보다. 아픈 옆구리가 살짝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출산의 고통이 죽다 살아나는 것이라길래 기필코 자연 분만을 한 나였다. 극한의 고통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출산의 고통이 죽다 살아나는 것이라면, 수술 후의 고통은 지옥에 던져진 것이었다. 척추 주사, 대정맥 주사, 근육 주사, 피부 패치, 내복약까지 7~8가지의 진통제를 들이부었다. 그래도 통증은 나를 삼켰다.
깨어난 후 4시간 안에 소변을 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시도했으나 수행하지 못했다. 곧바로 복도에 나가 걸으라는 지시가 따라왔다. 링거 거치대를 의지하여 발을 옮겼다. 오른쪽 옆구리에 야구공만 한 게 붙어 있었다. 처음엔 붕대 뭉치인 줄 알았는데, 내 살이 부은 것이었다. 옆구리를 왼손으로 감싸 안고 인사하듯 허리를 숙인 채 걸었다. 한 간호사가 나를 보더니 달려와서 말했다. "환자분, 그렇게 아프면 걷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나는 빨리 회복해야 했다. 아이 곁으로, 빨리. 링거 거치대의 부축을 받으며 계속 걸었다.
세 시간을 걷고 나서야 몇 방울의 소변을 볼 수 있었다.
M언니는 병실에서 다른 환자, 보호자들과 금방 친해져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언니는 어디서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한 시간마다 간호사가 와서 약을 챙기고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그때마다 나는 상의를 열어야 했다. 수술 절개선은 유방선을 따라 둥글게 위치했다. 언니에게 커튼을 닫아 달라고 부탁했다. 언니는 신경 써서 끝까지 닫아 주었다. 하지만 딱 한 번이었다. 매번 부탁하기가 미안해서, 수시로 내 알몸이 보여지는 걸 참아야 했다. 아파도 수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날 밤, 침대에 눕지 못하고 앉아서 잤다. 한 자세로 10분씩은 잘 수 있었다. 피곤에 곯아떨어졌다가 아파서 10분 만에 깨면 침대 각도를 바꾸어 다시 살짝 잠들고. 밤새 그렇게 반복했다.
모두 잠든 병실에서 고통과의 싸움은 오롯이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다행히 아침에 수간호사가 흉부 압박대를 가져다주었다. 전날 내가 요청했을 때는 그런 게 없다고 했던 간호사는 근무시간이 끝나고 찾아와 거듭 사과했다. 본인이 신입이라 몰랐다고. 정말 야속했지만,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해줬다.
수술 부위를 압박하고 나니 걷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짧게나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었고, 복도 끝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지 나는 바닥만 보고 걸었다.
난 그날 병원 복도를 10시간 걸었다.
그날 밤, 옆 침대에 나보다 젊은 여자가 입원했다. 남자친구가 간호를 하고 있었다. 수술을 하지는 않았는데 한 시간마다 간호사를 불러 불편한 점을 토로했다. 아파하는 신음 소리는 없었다. 차분하게 자기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했다. 나중에는 주치의, 교수까지 불렀다.
나는 고통을 참느라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 여자는 자기 상태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저 신기했다.
M언니가 말했다. "저게 자기 컨트롤이야. 아파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참는 건 미련한 거야."
의료진은 이미 마약성 진통제를 다 쏟아부었고,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머지 고통은 그냥 내가 감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련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M언니가 한 말이니까, 앞으로는 70%까지만 참으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술한 지 3일째, 48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퇴원 지시가 내려졌다. 흉강경 수술 환자와 동일했다. 대학 병원은 참 냉정했다. 이제 죽지 않으니 침대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퇴원 준비를 하며 몸에 꽂혀 있던 줄들을 제거했다. 척추에, 목 아래, 갈비뼈 밑에. 줄을 뽑고 반창고를 붙이고 살을 스테이플러로 찍는다.
마지막 소독과 드레싱 교체가 남았다. 비스듬히 침대에 기대어 있는데, 젊은 남자 인턴이 커튼을 휙 젖히고 들어와 앞섶을 열라고 했다.
"누울까요? 일어날까요?" 내가 물었다.
"상관없으니 여세요." 짜증이 섞인 대답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덜 아픈 자세를 찾고 있었다. 인턴은 빨리 하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너무 아파서.." 하고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대답했다.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아파요?"
그가 상처를 열었다. 난 그 말에 서러움이 복받쳐 엉엉 울었다.
하필 M언니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커튼은 완전히 열려 있었고, 나는 벗겨진 채로 울고, 사람들은 집중했다. 젊은 남자 인턴은 내가 개흉 환자인 걸 몰랐던 것 같았다. 커다란 상처를 보고는 큰 드레싱 포를 가져오겠다며 다시 나갔다.
시술이 다 끝나고도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 M언니가 돌아왔다. 옆 침대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은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왜 울어?"
'그래, 나도 얘기하고 싶었다구..'
커튼을 대충 닫은 것도, 참는 게 미련하다는 것도, 왜 울었냐는 것도.
언니의 말은 늘 맞았다. 그런데 그 말들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때는 다 나를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가슴뼈 절개를 피한 덕분에 빠르게 퇴원했다. 아들의 얼굴을 보니 좋았다.
하지만, 만약 다시 수술을 한다면 꼭 요양병원으로 퇴원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