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대를 옷 안에 감춘 채, 지하철을 탔다

돌봄을 받는 법을 몰랐다

by 꾸더칸

병원에는 버튼이 있었다.

10분마다 깨도 손끝 하나로 침대 각도를 바꿀 수 있었다.

집에는 그 버튼이 없었다.


남편은 단호박으로 죽을 쑤어 주었다. 수술 부기를 빼는 데 좋다고 했다. 5학년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옆에 붙어 모든 움직임을 수발들었다. 물컵을 건네고, 리모컨을 집어주고,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다.

고마웠다. 그런데 고마운 만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수술 부위만 아픈 게 아니었다. 어깨도, 팔도, 등도 전부 아팠다. 앉아도 아프고 서도 아팠지만 누우면 뼈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전동침대가 필요했다. 대여할 수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좁은 골목 빌라인 우리 집에 전동침대를 들이려면 사다리차까지 필요했다. 무엇보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전화로 직접 처리할 만큼 호흡이 길지 못했다. 모든 숨을 통증을 참는 데 쓰고 있었다.

그 과정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말은 더욱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한국어가 서툴러 전화 한 통을 대신할 수 없었고, 아들에게 시키기엔 아이가 너무 어렸다. 전동침대 대여에 관한 정보를 준 게 M언니였다. "필요하면 빌려서 써."라고 했다. 전화 한 통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언니에게 부탁할 순 없었다. 며칠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며칠이 아니었다. 2주가 지나도 누울 수 없었다.


밤이면 침대 한쪽에 베개와 이불을 산처럼 쌓고 어깨를 기댔다. 병원에서처럼 10분 단잠을 자고 깨는 건 똑같았다. 달랐던 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간호사가 와서 약을 건네지도, 상태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한 자세를 10분 이상 버티지 못하면 스스로 일어나 자세를 바꿔야 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남편과 아들이 깰까 봐 신음을 삼켰다. 그들이 깨면 나 때문에 잠을 설칠 것이고, 그러면 내일 학교에 가는 아이가 피곤할 것이었다. 그 계산이 통증보다 먼저 돌아갔다.


낮에는 쉬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남편이 자꾸 뭘 해 주려 했다. 물을 떠 오고, 과일을 깎고, 죽을 데우고. 그 손길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남편의 수고를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에 간 사이 천천히 설거지를 했다. 빨래를 널었다. 옆구리를 왼손으로 감싸 안고 허리를 숙인 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였다.

남편이 말했다. "왜 자꾸 일어나. 좀 쉬어."

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움직여야 빨리 나아."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솔직한 이유는, 아무것도 안 하고 돌봄만 받는 내가 쓸모없어 보이는 게 싫었다는 것이다.


집에 온 지 며칠 지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한참 안 갔고 연락도 없으니 삐칠 게 분명했다. 가쁜 숨을 숨기려 했는데 소용없었다. 결국 수술 사실을 알렸다. 걱정 말라는 말만 짧게 전하고 끊었다.


가족들에게 아프다는 얘기를 하면 병원비를 구걸하는 것 같아 싫었다. 나이 쉰이 되도록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내가 창피하고 비참했다. 오빠에게는 이미 알렸지만 다른 형제들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가깝지 않은 사이에 갑자기 아프다고 연락하면 그게 무슨 의미로 전달될지 두려웠다.


엄마는 먼 길이라 혼자 찾아오지도 못하고 전화도 자주 못 하셨다. 내가 힘들까 봐 참은 것이다. 대신 발만 동동 구르셨을 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며칠 뒤 둘째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 주소를 묻는 전화였다. 그리고 다음 날, 소고기와 죽을 배낭에 메고 찾아왔다.


차로 20분 거리에 살았지만, 왕래도 없고 전화도 하지 않는 자매지간이었다. 언니는 나보다 아홉 살 위인 데다 근엄한 성격이어서, 어릴 적부터 엄마 다음으로 어른이었다. 고등학교 교사로 늘 바빴고, 나나 언니나 살가운 성격은 아니어서 가깝게 지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언니에게 가보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언니는 수술 과정과 현재 상태를 꼼꼼히 물었다. 엄마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했지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태어나서 언니와 가장 많은 얘기를 한 날이었다. 그 후로도 언니는 두어 번 더 병문안을 왔다. 손에는 꼭 소고기가 들려 있었다.


30년간 친자매보다 더 친했지만, 병원에서 서운함을 안겨준 M언니. 그간 소원했지만 소고기를 메고 찾아온 친언니. 두 사람이 머릿속에서 나란히 섰다.

가까운 사이라고 더 잘해주는 건 아니고, 먼 사이라고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관계의 거리란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몸이 천천히 회복됐다. 2주 만에 피부에 찍은 스테이플러를 제거하고도 진통제를 한 달 넘게 먹었다. 하지만 매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압박흉대를 꽉 조이고도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감싸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느리고 짧은 산책이었다. 그래도 매일 나갔다. 걷는 것만이 내가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출근하기로 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잦아졌다. 나를 걱정해서 연락한 것이지만, 정말 바빠서 도움이 절실한 것도 느껴졌다. 언제쯤 출근이 가능하냐고 매번 물었다.

그때 나의 상태는 10분이던 단잠이 30분이 되었을 뿐, 여전히 제대로 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달만 더 기다리라고 큰소리를 쳤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바심 나게 했다.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다는 말 앞에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약속한 대로 한 달 후에 출근했다. 3년 동안 매일 바라던 일터로의 복귀였다. 옷 안에 흉대를 하고 느린 걸음으로 지하철만 이용했다. 아직 많이 흔들리는 버스는 무리였다. 회복에 비해 너무 이른 출근이었다. 하지만 일을 하는 시간에는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퇴근했다. 급여도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았다.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남편도 6개월의 백수 생활을 끝내고 중국 음식점 주방에 취업했다. 새로운 일이었지만 남편은 무슨 일이든 빨리 배우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일터를 가지게 됐다.

아이는 학교에 갔고, 남편은 주방으로, 나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아침마다 세 사람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그 풍경이, 나에게는 오랫동안 그리던 보통의 하루였다.

보통의 하루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는,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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