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팔아치운 시간

— 신용불량자 5년의 기록

by 꾸더칸

신용불량자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2억 원 계산서를 발행하고 며칠 후였다. 그리고 그 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O업체는 3차 부도까지 막지 못하고 최종 부도처리가 이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며칠 만에 법원에 회생신청을 했다. 부도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전에 겪었던 기획 법인파산과 다르지 않았다. 이 또한 준비된 부도였던 것이다. 법인회생도 2년을 끌고 가다가 결국 파산으로 넘어갔다. (그 파산 절차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외담대(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로 받았던 수억 원은 고스란히 나의 빚으로 넘어왔다. 부도 직전 납품했던 2억은 매출계산서로만 흔적을 남겨 내가 부가세까지 내야 했다. 다른 거래처도 있었으나 O업체 의존율이 80%였기에 나는 바로 파산했다.

겉에서 보면 나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냥 돈 못 갚은 사람. 신용불량자.


중국 시절부터 얽힌 친인척이자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친인척 S의 회사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오랫동안 많은 오더를 거래했기에 수십억 원의 타격을 입었다. 다행히 O업체 의존율이 40% 정도여서 소생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S는 버텨내기 위해 모든 자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녹록지 않았고 직원들의 급여는 또 밀리기 시작했다. 못 버틴 직원들은 하나둘 떠났고, 사장은 그때마다 안도했다. 그리고 떠난 직원들의 자리는 모두 내가 메꿔야 했다.


나는 이직을 할 수 없는 신용불량자였다. S는 내 회사 잔고와 공장에 남은 물건들까지 모두 가져갔다. 그뿐 아니라 지인에게 돈도 빌려오라고 시켰다. 어차피 돈도 오더도 사무실도 S의 지원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만든 회사는 처음부터 내 회사가 아니었다는 걸. 나는 그냥, S의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달라는 걸 다 내주었다. 신용불량자는 선택지가 없으니까.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받기 위해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살릴 수 있다면 회사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급기야 재무부장이 자금 스트레스로 공황장애를 얻어 자리를 비우고, 돈 관리까지 내가 해야 했다. S는 약속과 달리 나에게 투명한 장부를 보여주지 않았다. 자금 계획을 세울 수 없던 나는, 전 부장처럼 매일 채권자들에게 시달렸다.


그렇게 2년을 버텼지만 결국 회사는 파산했다. S의 회사도 자기가 당했던 방식을 답습하여 똑같이 파산 절차를 밟았다. 몰래 새 사무실을 얻고 가족 명의로 다른 사업자를 냈다. 그리고 S는 앞서 파산한 대표들처럼 제일 먼저 도망쳤다.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독촉 전화에 시달렸다.

S에 대한 존경 같은 건 진작에 없었다. 그래도 이 배신은 달랐다. 나는 또 혼자 남겨졌다.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고 전화기를 껐다. 그리곤 처음으로 1주일 휴가를 받았다. 때는 코로나가 세상을 멈춰 세운 지 석 달째였다. 전 세계가 경악하는 동안, 나는 마스크 챙길 정신도 없었다. 온 세상이 같이 무너져버렸으면, 하는 이상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아빠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일 년의 반을 베트남에서 지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매일 9~10시 퇴근이었다. 그래도 아들은 항상 바쁜 엄마를 이해해 주는 착한 아이였다.

자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며 항상 밝던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수업은 EBS 방송으로 대체되었고, 친구도 선생님도 없이 소파에 누워 수업을 눈으로만 쳐다봤다.


그 아이를 보다가, 멈췄다. 아이가 이렇게 된 동안 나는 어디 있었나. 베트남 공장, 납품 검수, 채권자 전화. 그 어디에도 아이는 없었다. 아이의 시간이 이대로 지나버리면, 내가 나중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순간 기뻤다. 솔직히 말하면, 기쁜 이유가 아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디어 빠져나올 명분이 생긴 것이었다.


한 번도 일을 안 하고 주부로 사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안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난 집안일을 싫어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해내는 사람이다.

가사를 직무처럼,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2주일의 식단을 미리 계획하고 매일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공했다. 내 공부하듯이 아이를 가르쳤다. 매일 책을 몇 권씩 읽히고 국어, 영어, 수학 공부를 시켰다. 학습 스케줄을 짜고 매일 하게 했다. 아이는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나중에야 아닌 걸 알았지만, 그때는 아이도 즐거운 줄 알았다. 아이와 잘 놀지 못하는 나는 공부가 곧 놀이라고 생각했다. 놀 거리가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에 생각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일을 그만두고 두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입술 색깔이 빨개져서 세수하다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개운하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 느껴봤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컨디션으로 아침을 시작하는구나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이 편해서 즐거운 것도 잠시였다.


청소기 돌리다가 허리가 삐끗했다. 힘을 많이 준 것도 아니고 어려운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닌데, 허리가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황당해서 화가 났다. 어찌해야 하나 한참을 검색하다가 내 몸이 얼마나 한심한 상태인지 자각했다. 생존 근육조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허리가 나을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곤 걷는 것 밖에는 없었다. 처음엔 1시간만 걸어도 하루 종일 피곤했다. 그래도 매일 걸었다. 점차 시간이 늘어났다. 부상과 회복을 반복하며 3년 차에는 3시간 등산도 할 수 있었다.

나를 돌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3년의 시간은, 몸을 돌보고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행복하지는 않았다. 쉬는 게 아니라 멈춘 것 같았다. 패션 업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다른 길도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갇혀 있는 느낌. 코로나가 세상을 닫아버린 것처럼, 나도 완전히 닫혀 있었다.


그때 나는 몰랐다.

다시 일할 날을 기다리는 동안, 내 몸이 먼저 다른 신호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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