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나는 자꾸 재고 있을까
스마트폰을 열면 제일 먼저 무엇을 보는가.
누군가는 뉴스를 본다고 한다. 누군가는 날씨를 확인한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드를 스크롤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오늘 아침 일어나서 누가 어떤 카페를 갔는지, 누가 어떤 가방을 샀는지, 누가 어떤 여행지에 있는지. 그리고 잠시 후, 이유를 알 수 없는 묵직한 감각이 가슴 한가운데 내려앉는다.
이게 이상한 일일까.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것과 건강한 것은 다르다. 비교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루 종일, 아주 오래전부터, 거의 숨 쉬듯 일어난다. 그 사람에게 비교는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다.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것이다. 생존의 언어다.
1954년,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인간에게는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신을 평가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을 때, 인간은 자동적으로 주변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비교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의 핵심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절대적인 점수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반에서 몇 등인지, 옆 반과 비교하면 어떤지, 그런 맥락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 과정에서 갖추게 된 능력에 가깝다.
비교에는 크게 두 방향이 있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는 상향 비교,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는 하향 비교. 상향 비교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하향 비교는 순간적인 안도를 주지만, 그것에 기대기 시작하면 성장을 멈추게 한다.
중요한 건, 비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비교가 언제부터, 어떻게, 얼마나 깊이 자리를 잡았느냐다.
나는 어릴 때 다음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
위아래로 똑똑한 형제자매 사이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위로는 성적도 좋고 선생님들에게도 칭찬받는 오빠가 있었고, 아래로는 어려서부터 눈에 띄게 영리하다는 말을 듣는 동생이 있었다. 그 사람도 공부를 못한 건 아니었다. 성적은 평범하거나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위아래가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부모가 대놓고 "왜 오빠처럼 못 하니"라고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 명시적인 비교는 드물었다. 그런데 성적표를 받는 날, 오빠의 성적표가 냉장고에 붙는 동안 자신의 것은 그냥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상 받은 날, 동생이 잘했다는 얘기에 방 안이 환해지는 동안 자신의 소식은 스쳐 지나갔다. 말로는 비교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비교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스스로 비교를 학습한다. '내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부터 '타인'이 된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준이 바뀌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사람은 어른이 된 후에도 독특한 패턴을 보였다.
SNS에서 누군가 새로운 물건을 쓰는 걸 보면 자신도 사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생겼다. 꼭 필요하지 않아도, 자신의 경제 상황에 어울리지 않아도. 가전제품은 항상 가장 최신 모델이어야 했고, 스마트폰은 항상 최상위 라인업이어야 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가져야 한다는 느낌. 남들이 갖고 있는데 나만 없으면 뒤처지는 것 같다는 감각.
이것을 단순히 허영이나 소비 습관의 문제로 보면 핵심을 놓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패턴을 '지위 소비(status consumption)'라는 개념으로 분석한다. 물건이 가져다주는 실용적 가치보다 그것이 나를 어떤 위치에 놓아주는지가 구매 동기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패턴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를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측정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물건을 사는 순간, 짧은 안도가 온다. '나도 저 정도는 된다'는 느낌. 그런데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 피드에서 더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이 등장하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다. 비교의 기준점은 늘 움직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가치의 조건(conditions of worth)'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데, 어린 시절 중요한 사람들(부모, 교사 등)로부터 "이럴 때 너는 좋은 아이야", "이럴 때 너는 부족해"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으면서 자신의 가치를 조건부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ㅇㅇ할 때만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내면의 믿음이 형성된다.
형제자매와 비교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에게 그 조건은 이렇게 새겨진다. '나는 남들보다 나을 때만 인정받는다.' 또는 '나는 남들만큼 갖추었을 때만 충분하다.' 이 믿음은 어른이 된 후에도 조용히 작동하며 행동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물건을 살 때도, SNS를 볼 때도, 누군가의 성취 소식을 들을 때도.
명시적인 비교 한마디가 없었어도, 분위기가 반복적으로 전달한 메시지는 내면 깊숙이 새겨진다.
페스팅거의 이론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 비교는 주로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같은 학교, 같은 동네, 같은 직장 안에서.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SNS는 전 세계 수십억 명의 하이라이트를 24시간 내 손안에 가져다 놓았다.
국내 연구에 따르면, 조건부 자아존중감이 높은 인스타그램 이용자일수록 자신보다 우월해 보이는 사람과 더 자주 비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우울감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건부 자아존중감이란, 자신의 가치가 외부 조건(성취, 외모, 소유물 등)을 충족할 때만 유지되는 불안정한 자존감을 말한다. 어린 시절 가치의 조건을 학습한 사람일수록 이 자존감의 형태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릴 때 비교를 생존 언어로 배운 사람일수록 SNS에서 더 많이, 더 깊게 비교하고, 더 자주 무너진다. 이건 의지나 자제력의 문제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새겨진 패턴의 문제다.
심리학은 여기까지 설명해 준다. 비교가 어떻게 학습되고, 어떻게 내면화되고,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이론은 정확하고, 연구는 일관적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고 싶다.
비교가 습관인 사람에게 "비교하지 마라"는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 사람이 비교를 선택한 게 아니라, 비교가 그 사람의 언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말하기 전에 단어가 먼저 입 안에 올라오듯이, 타인을 보기 전에 비교의 시선이 먼저 켜진다. 그게 문제라는 걸 스스로도 안다. 그런데 끄는 법을 모를 뿐이다.
내가 보기에 비교 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첫 번째 질문은 "왜 나는 비교하는가"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나는 언제부터 나를 타인의 기준으로 봐왔는가"라는 질문이다.
시작이 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없다. 어느 시점에, 어떤 환경에서, 자신을 보는 기준이 '나'에서 '남'으로 이동했다. 그 이동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비로소 되돌아오는 방향이 보인다.
물건을 살 때마다 잠깐 멈춰보는 것도 방법이다. '이게 갖고 싶어서 사는 건지, 뒤처지기 싫어서 사는 건지.' 두 가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동기다. 전자는 나를 향한 선택이고, 후자는 타인을 향한 반응이다.
비교를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고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비교의 기준점이 늘 바깥에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도착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셈이다. 기준이 움직이는 한, 충분함은 오지 않는다.
나는 비교 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비교를 배운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언어 말고도 쓸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다. 나를 기준으로 나를 보는 언어. 그 언어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배울 수 있다.
충분함은 남보다 앞설 때 오는 게 아니다.
내가 나를 기준으로 봐줄 때 비로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