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도 자존감도 잃어버린 그 겨울의 나
스무 살의 나는 늘 늦었고, 늘 밀려났다.
자꾸만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던 그 시절, 나는 나를 붙잡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사소한 선택 하나에도 자꾸 흔들렸다.
E대 원서는 죽어도 못 써준다는 담임에게 삭발로 반항했다. 하지만 재수는 절대 없다는 아빠 말에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원서 마감 하루 전날 담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E대 미달이니까 빨리 학교로 와, 지금 원서 써야 돼. 중위권 애들까지 다 쓰고 있어.”
당시 우리 학교는 E대 재단이었다. 원서 접수 인원 미달의 정보가 흘러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민하는 게 싫어서 접수 첫날 S여대에 이미 원서를 넣은 후였다. 결국 다음날 Y대, E대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들의 대량 미달 사태가 뉴스를 장식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거길 왜 다니고 있어?” 학교에서 만난 동창은 “어머, 니가 우리 학교에 왜 다녀? 재수 안 해?”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땐 누가 나를 판단하는지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아팠다. ‘원서만 조금 늦게 썼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E대에 원서만 썼으면 무조건 합격이고 엄마, 아빠의 자랑거리가 됐을 텐데. 이렇게 창피하고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을 붙잡지 못한 죄책감은 스무 해 동안 마음 한구석을 긁어댔다.
뭐든지 미리 준비하고 빨리 처리하는 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진지하게 재수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가고 싶은 학과가 없었다. 대학 간판을 위해 재수를 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명분도 없고, 더 나은 대학을 간다는 보장도 없으니 시간 낭비라고 판단했다. ‘집에서 원하는 건 대졸의 학력이니 아무 데나 그냥 다니자.’
아무튼 학과보다는 여대가 문제였나 싶기도 했다. 남자들과 오히려 잘 맞는 성향이라 학교에는 정을 붙이지 못했다. A 아니면 F학점이라는 극단적 성적으로 유급을 하고 9학기를 맞이했다.
대학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엄마의 소원이 내가 졸업하는 거라는, 너무 뻔한 회유책에 넘어가 열심히 마지막 학기에 임했다. 때는 IMF의 칼바람이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였다. 재테크 실패로 자수성가의 대미를 장식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생활비를 책임지고 계셨던 아빠는 끝내 실직을 하셨다. 내 마지막 등록금은 언니를 비롯한 지인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그때 나는 가난보다, 아무것도 될 것 같지 않은 내가 더 두려웠다. 의류학과 전공인 나는 홈패션, 맞춤복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고 엄마에게 생활비도 드렸다. 졸업이 다가왔을 때 나에겐 취업이 너무나 절실했다.
IMF의 칼바람에 제일 먼저 넘어진 건 의류회사였다. 사람들의 지갑과 함께 굵직한 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의류시장은 얼어붙었다. 막내 디자이너로 채용되려면 첫 번째 조건이 신체 사이즈였다. 통바지에 배꼽티가 유행이었던 그 시절은 팔다리만 가늘던 내게는 너무나 가혹했다.
옷 한 벌 뚝딱 만들어내는 실력은, 막내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날씬보다는 성실함을 요구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에 입사했다. 요즘 말로 하면 디자이너 브랜드지 디자이너의 이름을 내건 양장점이었다. 출근하면 매장과 지하 카페 청소부터 했다. 첫 출근한 8월 1일, 역대급 태풍이 강타하여 홍수가 났고 지하철역이 침수되어 1주일 동안 집에 가지 못했다. 친구네 집에서 쪽잠을 자고 출근하면 무릎 꿇고 앉아 매장으로 들이친 물을 닦아냈다. 실장의 직함을 가진 사모는 왜 매일 똑같은 옷이냐며 타박을 했다.
손님이 없을 때 탕비실 커튼 위에 숨어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월급으로 35만 원을 받았다. 그땐 그 금액이 비정상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난 매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당시 파리 무대에서 패션쇼도 하셨던 디자이너 선생님은 얘기를 하며 손등으로 옆구리와 가슴을 건드렸다. 오너의 상습 성추행이 아니었다면 몇 달 만에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디자이너로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친척의 소개로 원단 기획회사에 입사했다. 바이어 접대가 많긴 했지만 일을 가르쳐주는 선배도 있고 능력 있는 사장님도 너무 좋았다.
절대 안 된다는 사장님의 눈을 피해 사무실에서 밤을 새 가며 일했다. 좁은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서랍 깊숙이 숨겨둔 헤어드라이기와 화장품으로 단장을 했다.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방금 출근한 척 쇼를 하며 1주일을 버티기도 했다. 빠른 시간에 성과를 내고 매일 칭찬을 듣고 사장님의 신뢰를 얻었다. 늦은 퇴근 후에는 선배들과 술자리가 이어졌다.
친절한 선배와 능력 있는 사장이 동시에 남자로 변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너무 재밌었다. 돈 많은 집안에 강남에 아파트도 있다고 자랑하던 선배가 왜?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하고 예쁜 아내와 아이를 둔 사장이 도대체 왜?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왜 나를 좋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 상황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도 몰라 도망쳤다. 업계에는 금세 소문이 돌았고, 난 그 좁은 업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난 다시 아르바이트의 세계로 돌아갔다. 대학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다. 맨 처음 아르바이트는 과외였는데, 공부할 생각 없는 사춘기 중학생을 가르치는 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눈높이를 맞출 수 없었다.
비디오테이프 대여점, 카페, 호프집, 결혼식 도우미, 고시원총무, 대학병원 의국, 구청, 건설연구원 등 2달~2년까지 다양한 장·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단순 업무부터 서비스, 급여계산, 영어논문 정리, 콘퍼런스 준비 등 업무도 다양했다. 의외로 그 시간들이 숨 쉴 틈이 되기도 했다. 일보다 사람으로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안정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취업했을 때와는 다르게 일도 인간관계도 순조로웠고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정직 제의도 받았다. 하지만 서른 살이 다가오자 나는 승부수를 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어만 잘하면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이 유행처럼 들리던 때였다. ‘니하오’도 모르던 나는 학원을 다니며 발음을 배우고 독학으로 hsk 초급을 땄다. 친구들을 넘어 남자 선배들까지 하나둘 결혼하고 아이 낳고, 경조사비 지출이 줄을 이었다. 직업도 애인도 없던 나는 집안에서 여전히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있었다.
전방위적 압박에 이게 기회다 싶어서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하얼빈으로 연수를 떠났다. 다시는 지긋지긋하고 고리타분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0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 하얼빈에서 하루에 12시간을 공부하며 나의 20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뭘 잃었는지도, 무엇을 붙잡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냥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그게 나의 20대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