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의 끝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다.

— 중국 공장에서 버티기

by 꾸더칸

중국에 간 이유는 단순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하루에 12시간을 공부하며 3개월 만에 고득점으로 HSK를 통과했다. 중국 교수들이 진학을 권유할 만큼 훌륭한 점수로 수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언어만 되면 길이 열릴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학교 밖 세상은 무섭기만 했다. 민족도 사투리도 너무나 다양한 중국에서 중국어를 잘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걸 느꼈다. 내가 표준어를 사용한들 무엇이 표준어인지조차 관심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시험은 통과했지만, 소통은 여전히 두려운 영역이었다.


그 무렵, 친척이 중국에 봉제 공장을 오픈했다. 그저 중국에서 oem 생산을 몇 차례 해 본 경험으로 너무 쉽게 생각하고 시작한 공장이었다. 기존 공장을 양도받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 설립한 공장이었다.

나는 더 어리석었고, 더 절박했다. 회사의 내실을 따질 여유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회’라는 말 하나에 매달렸다. 내게 온 첫 행운이라 믿으며 급여도 안 물어보고 대련으로 향했다. 내쳐지기 전까진 절대로 내 발로 나오지 않으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중국인 직원만 160명인 공장에 한국인은 공장장과 나, 단 둘 뿐이었다. 공장은 나이 많은 기술자로, 제품의 품질만 담당했다. 중국 생활은 처음이라서 내가 그를 챙겨야 하는 입장이었다. 사무실에는 다섯 명이 있었고 관리 업무는 경력직 조선족 직원 A가 맡았다.

봉제 공장은 처음인 내가 회사에서 맡은 역할은 통장과 도장 보관이었다. 그 외에는 할 줄 아는 일도, 맡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난 누구보다 빠르게 배울 자신이 있었다.


A는 나에게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는 시간은, 바쁘게 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으니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지낸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A가 갑자기 출근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사장에게서 퇴사 소식을 들었다. 퇴사 이유는, 나 때문이라고 했다. 나와 무슨 교류라도 있었어야 하지 않나. 사장의 역정을 듣는 것도 억울했고,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난 것도 서운했다.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무슨 잘못을 했던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유능했던 A를 대신해 회사 관리를 맡게 된 것이다. 공장에는 기숙사와 직원 식당까지 있었다. 나는 모든 관리의 책임을 떠안은 사람이 되었지만, 실상은 권한 하나 없는 법인장이었다.

중국어와 봉제는 물론이고 생산, 무역, 회계, 노무, 소방, 환경까지. 모든 걸 동시에 배워야 했다.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다.

9주 동안 휴일 없이 14시간을 일한 적도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건지, 귀신이 움직이는 건지 감각이 없었다. 납기에 밀려 밤샘 작업 끝에 출고하는 날이 반복됐다. 어느 날 갑자기 고꾸라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건 버틸 만했다. 더 힘들었던 건, 사람과 구조였다.

신생 외자 법인을 중국에서 곱게 볼 리 없었다. 분기마다 관공서 사람들이 찾아와 공장을 조사하고 선물을 챙겨갔다. 회사를 만만하게 본 건 관공서뿐만이 아니었다.

사장은 가끔 출장 올 때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직원들의 요구 사항을 기준 없이 들어주었다. 사장이 떠나고 나면 상황은 더 악화됐다. 직원들을 관리할 기준도 명분도 사라지고 없었다. 회사는 호구가 되었고 직원들은 파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직원들은 미싱 앞에 앉아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때우다가 퇴근했다. 그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생산에 참여하지 않았다. 납기를 맞추지 못해 바이어들에게 쌍욕을 먹는 건 흔한 일이었다.

사장에게 아무리 사정을 설명해도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나보고 어쩌라고. 니가 알아서 좀 해봐.” 서른한 살의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말이었다. 하지만 A를 내몬 원인이 나라는 말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A가 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나보다 훨씬 잘 처리했을 텐데..” 회사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 게 내 책임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장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래도 친척의 회사였기에 버텨야 했다.


2년이 지나서야 나는 사장에게 매달렸다. 더는 못하겠다고, 이러다가 시체로 한국에 돌아갈 것 같다고.

그때 나는 심한 불안과 부정맥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대로 병원 진료도 받지 못한 채 약국에서 약만 사다 먹는 상태였다.

결국 법인은 다른 회사로 양도됐다. 직원들의 퇴직금과 위로금까지 챙겨주고, 공장과 기숙사, 식당 집기까지 정리한 뒤에도 모든 서류 절차가 끝나기까지는 6개월이 더 걸렸다.


한숨 돌리고 설 명절에 한국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형제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에 조금씩 취해갈 즈음, 나는 내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친언니의 입에서 나왔다.

“ㅇㅇ이(나)가 하는 일도 없이 ㅇㅇ이(사장) 등골 빨아먹고 있다며?”

중국에서 나와 한집에 살던 사람이 전한 말이었다.

언니는 내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 말을 ‘사장’에게 하고 있었다. ‘사장’은 그 말에 부정하지 않고 그냥 허허 웃어넘겼다.


기가 막혔다. 억울함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악착같이 버텼던 세월이, 책임을 다하려고 했던 내가, 완전히 부정당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나와 한집에 살던 ‘사장’의 ‘사모’였던 친언니라는 사실이 더 잔인했다. 난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그 말 한마디, 그때의 감각을 생생히 기억한다.

내 평생 가장 아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