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서의 10년, 좌절의 시작
“하는 일도 없이 사장 등골 빼먹는다”는 언니의 충격 발언은 그냥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의미를 쪼개고 희석해서 뱃속 깊숙이 넣었다.
공장을 정리한 후, 사장은 한국 회사로 출근하기를 권유했다. 하지만, 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남편을 이유로 들었지만, 난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나를 잡아준 건 남편이었다.
공장의 중간 관리자였던 그는 사방이 적인 공장 안에서 유일한 내 편이었다. 매번 급박한 출고일을 위해 밤샘 작업을 할 수 있게 직원들을 설득해 준 것도, 파업으로 집단행동을 하는 상황에서 샘플이라도 생산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남편이었다.
사장은 이런 일을 전혀 몰랐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만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그렇게 묵묵히 하는 사람이었다. 합당하지 않은 파업에도 그는 동조하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인이 한국 비자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여행 비자를 받으려 해도 상당한 액수의 잔고증명이 필요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려면 혼인신고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국에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결혼비자를 받아 들어온 남편은, 뒤늦게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결혼 허락을 받았다.
서울 출신 대졸 35세 여자와 중국 시골 출신 농민공 30세 남자의 결혼은 행정절차만 힘들었을 뿐, 예상했던 양가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다.
단지 순서가 좀 뒤바뀌었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결혼식이 없었을 뿐이다.
결혼 계획 전에 내 돈을 들여 남편 명의로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혼인신고 후에 부모님을 뵙고 결혼 허락을 받았다.
따뜻한 5월의 어느 날, 남편의 고향집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동네 이웃들을 초대했다. 가마솥을 걸어 모락모락 김을 올리며 음식을 하고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였다. 5월에 어울리지 않는 폭우가 쏟아졌지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장미꽃 부케를 든 나는 행복했다.
나의 신혼 생활은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남편이 나의 가족들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다. 나이가 찬 막내딸에게 부모님의 기대는 없었으나, 형제들의 무시는 대단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한국 남자가 아니었기에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몸은 중국에 있었지만 한국 사무실의 일을 하면서 중국 OEM 공장을 관리했다. 분양 대금을 완납한 아파트는 건설사의 부도로 공사가 멈췄고, 매달 대출상환을 하면서 월세를 사는 상황이었다. 회사의 재정 상태도 날로 어려워졌고, 친척이라는 이유로 나에게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급여가 연체됐다.
집과 사무실 월세를 각각 유지하기가 어려워 결국 사무실로 들어가 살아야 했다. 책꽂이를 파티션 삼아 침실을 만들고, 빈 책상을 붙여 침대를 만들었다.
그 무렵, 임신을 했다.
임신 8주 전후로 몸이 너무 안 좋았을 때, 사장이 중국으로 출장을 왔다. 평소처럼 공장을 방문하고 접대를 받고 나는 통역을 했다. 사장은 공장 사장과의 대화 중에 나의 임신 소식을 우스갯소리에 섞어 넣었다. 그러면서 내 옆에 앉아 연신 담배를 피웠다.
짓밟힌 느낌이었다.
아직 임신 초기여서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농담으로 나의 개인적인 일이 밝혀졌다. 그리고 내가 임산부라는 걸 알면서 계속 담배를 피우는 건, 또다시 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예전에 동석한 거래처의 직원이 임신했을 때는 예의를 차리며 항상 나가서 담배를 피웠었기 때문이다.
섭섭한 마음에 더해 어지러움이 너무 심해 사직 의사를 밝히며 사장에게 면담 요청을 했다. 사장은 귀국할 때까지 내 전화를 피했고 그대로 도망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사모(친언니)는 사장의 뜻이라며 말을 전했다. 나에게 고마워하라는 뉘앙스였다.
”내가 너 힘드니까 그만두게 해달라고 얘기했어. 인수인계서 써놓고 그만 두래.”
이 말은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로 아픈 말이 되었다.
면담은 피하고, 인심 쓰듯 외부인을 통해 퇴사를 통보한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막 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언니에게 버럭 화를 냈다. 언니는 은혜도 모른다며 화를 냈고, 나는 몇 달 뒤 이 일에 대해 언니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다음날 인수인계서를 작성하여 한국 직원들에게 메일로 보내고 퇴사했다.
‘내가 나가기를 기다렸나 보다. 그래서 나만 급여를 주지 않았구나, 내가 하는 일이 하찮았구나.’
나의 생각은 그렇게 치달았다.
앞서 들었던 “하는 일도 없이 사장 등골 빼먹는다”는 말과 “인수인계서 써 놓고 그만 두래.”
이 말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땅을 치며 분개하고 울었다. 내가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한 달을 매일 울었다.
결국 병원 검진 중에 계류 유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뱃속에서 아기가 성장을 멈췄다. 수술로 아이를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그렇게 슬프게 울어 댔으니 아기가 버틸 수 없어 포기한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혼자 들어와 수술을 받고 한 달 동안 몸조리를 했다. 유산도 출산과 같이 몸조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모멸감과 유산의 아픔을 안고는 계속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살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고 또 뱃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퇴사를 했으니 얹혀살던 사무실을 정리해야 했고, 나는 퇴직금도 밀린 급여도 받지 못해 이사할 집을 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중국으로 돌아가 언니에게 먼저 사과했다. 살 집이 없어 언니에게 얹혀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이을 수 없이 찢어져버린 마음을 누덕누덕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