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을 얻고, 아이를 낳고, 그래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직장도 아이도 한꺼번에 잃어버린 나는 백수가 되어 언니네 집에 얹혀살았다.
중국어를 잘 하지만 여전히 남편과는 말을 섞지 않는 언니와, 학교에서 배운 중국어 욕을 남편에게 써먹는 사춘기 조카와 함께 살았다.
다행히 조카는 기숙사에서 살아야 하는 외국인학교를 들어갔고, 언니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주말마다 집에 오는 조카에게 안방을 내어주는 것 외에 내가 해줄 것은 없었다. 언니는 나에게 조카를 부탁하지 않았다. 다 알아서 하니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가 사춘기여서 그렇게 얘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주말에 집에 온 아이에게 맛있는 거라도 챙겨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가 없던 그때의 나는, 사춘기 아이의 돌발 행동이 버거웠다.
그렇게 그때 나는 아무 역할도, 아무 선택권도 없는 존재였다.
취업은 힘들고, 밀린 급여는 지급되지 않았다. 수중에 돈은 없었고 분양받은 아파트는 기약 없이 공사가 멈춰있는데 은행이자는 매달 내야 했다. 나날이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알고 지내던 한국 회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나를 채용할 이유는 없었다. 한국회사든 중국회사든 봉제업계에는 이미 조선족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의 급여는 나의 반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나갔다.
속이 점점 타들어갈 무렵 아는 사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연락이 올 것을 예상은 했으나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연봉협상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목말라 있었다. 다른 조선족 직원들의 급여 수준에 맞추기로 하고 취직을 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는 해결이 되는 정도였다.
하필 그즈음 조카로부터 언니가 한국에서 새 차를 뽑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전 방학 때 언니네 식구가 해외여행 다녀온 얘기를 겨우 참으며 들었다. 그런데 이어서 새 차를 사고 싶다는 언니의 얘기에 반농담으로 “내 밀린 급여 주기 전에 차 사기만 해봐.”라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었다. 언니는 차가 꼭 필요하지 않은 늦깎이 대학생이었고, 나는 밀린 급여 덕에 언니 집에 얹혀살며 조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힘없는 으름장은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자기들은 여행 다니고 차 사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나는 왜 편히 살 집도 없는 건지 답답했다. 욱하는 마음에 저축을 털어 집을 얻었다. 더 이상 같이 살다가는 폭발할 것 같았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는 조카에게 집 열쇠를 꼭 쥐어 주었다. 주말에 집에 올 때 내가 없을 수도 있으니 열쇠 잘 챙기라고 했다. 그리고 주중에 깨끗하게 짐을 빼서 이사를 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에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고 받지 않았다. 그 이후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조카를 혼자 두고 나온 것이다. 내가 공식적인 보호자는 아니었지만, 실상은 중1 아이를 혼자 방치한 것이다. 알고 그랬다. 언니와 형부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다.
그 일은 오랜 시간 죄책감으로 나를 따라다녔다. 몇 년 후 다시 언니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는,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새로 출근하는 회사에서 맡은 일은 봉제를 넘어 또 다른 도전, 한국 브랜드의 중국 유통이었다. 사장은 탄탄한 자본력도, 확실한 비전도 없었고, 이미 일하고 있는 팀에 나를 팀장으로 불렀다. 그 의도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팀 내 조선족 직원의 자진 퇴사를 유도하기 위해 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장의 예상대로 한국인 여자 상사가 마음에 안 들었던 직원은 퇴사했고, 뒤이어 한국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들어왔다.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 거래처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였다.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해서 남편과도 잠시 헤어지고 딸만 데리고 피신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손님인 듯했으나 점차 사무실로 밀고 들어왔다.
때마침 나는 다시 임신을 했다. 천사의 얼굴을 한 전 수석디자이너는 어느 날 내 뒤통수를 쳤다. 내가 위아래 없이 너무 건방져서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했다. 황당한 일이었으나, 그런 사람과 마주 앉아 뭘 따져야 하는 게 피곤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았다. 난 바로 퇴사했다. 어쩌면 이 또한 사장의 그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곧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해야 하니 다시 취업을 할 수는 없었다. 육아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당시 중국은 타오바오(인터넷 오픈마켓)가 인터넷 쇼핑의 중심이었다. 타오바오 판매자만 1억 명이 넘는다고 했다. 나는 마진이 높고 경쟁력 있는 제품을 팔고 싶어서 한국 홍삼제품을 선택했다. 사전을 찾으며 중국어로 번역하고 이미지를 준비해서 직접 상세페이지를 만들었다. 사이트의 판매자를 위한 빼곡한 중국어 설명은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그래도 오픈하고 바로 다음날 첫 주문이 들어왔다. 중국 사이트는 고객 문의 게시판이 없고 실시간으로 상담을 해줘야 했다. 중국 사람들은 이것저것 질문하고 값을 깎는 것을 좋아한다. 중국어 회화 책에 흥정하는 방법이 빠지지 않고 꼭 나오는 이유다. 그렇게 장사를 하며 만삭이 되고, 출산을 하고 병원에 누워서도 홍삼을 팔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키보드를 치고, 등에 업고 포장을 했다. 시부모님은 200킬로 떨어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오로지 남편과 둘이서 아이를 키웠다.
아이가 두 돌이 되면서 다시 본업을 시작했다. 어렵사리 프리랜서로 생산품질관리 일을 맡았는데, 일도 어려웠지만 약속대로 결제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 7년 동안 기다린 아파트 공사가 마무리되어 인테리어 공사도 겹쳤다. 중국은 아파트의 시멘트 벽만 세우고 열쇠를 넘겨준다. 전기/수도 공사부터 모든 것을 입주자가 알아서 하는 시스템이다. 보통은 인테리어 회사에 맡기지만 우리는 돈을 아끼기 위해 직접 공사를 진행했다.
세 살 아이를 데리고 매일 남편과 아파트 공사현장으로 출근했다. 처음 해보는 공사는 당연히 순조롭지 않았다. 전기공사 하다가 난방호스가 절단되어 이어 붙였고, 수도관이 터져서 원목마루를 다시 시공했다. 현관문을 직접 설치하다가 철근을 잘라먹기도 했다.
6개월 동안 이어진 공사 기간 동안 남편과 정말 많이 싸웠다. 각자 출근하며 공사하며 아이 챙기느라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우리가 무언가를 쌓아 올리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공사가 끝나고 입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으며 버텼다. 모든 걸 나의 동선에 맞추어 배치하고, 붙박이장까지 내 맘대로 짜 넣은 내 집이 완성되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을 줄 알았다.
집안 곳곳에 예쁜 화분도 놓고 베란다에는 상추씨도 뿌렸다. 공사하고 남은 돈을 탈탈 털어 흰색 승용차도 샀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것이 이뤄졌다.
32평 아파트에 자동차 한 대만 있으면 걱정 없이 살 줄 알았다.
성실하게 일하면 굶지는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