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약속하다.

—함께하기 위한 헤어질 결심

by 꾸더칸

어릴 때부터 나의 꿈은 소박했다.

온전히 나의 힘으로 이룬 32평 아파트에 자동차 한 대.

열 식구가 항상 큰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린 나에게는 아주 소박한 꿈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평생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더 이상 욕심 없이 성실히 살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꿈을 이뤘다.




혼수 장만하듯 새 물건으로 집을 채웠다. 결혼식도, 신혼집도, 신혼여행도 없었던 결혼생활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며칠을 쏘다녀도 마음에 드는 타일과 조명이 없어 일주일을 검색해서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현관문도 온라인 주문하고 기차역에서 픽업하여 직접 설치했다. 수납장 문고리 하나까지 고르고 골랐다. 이케아 상품 리스트를 다 외운 것 같다.

가장 좋은 가전을 설치하고 새 그릇과 주방용품을 들였다. 넓어진 주방이 좋아서 자주 음식을 했다. 음식을 많이 하고 싶어서 친구들을 초대했다. 네 살 아이가 거실에서 자전거를 타도,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려도 되는 넓은 집이 생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불안하고 허전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프리랜서 일은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 남편과 둘이 장사를 해보려고 해도, 남편도 나도 외지인인 그곳에서는 쉽지 않았다. 타오바오 판매로는 생활비도 부족했고, 저축은 인테리어에 다 쏟아부은 상태였다. 수입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집도 차도 다 소용이 없었다.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었다. 집만 완성되면 불안이 해소될 줄 알았다. 하지만 새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의 이유를 파고들수록, 내 꿈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을 얻는 데 성공한 게 아니라, 나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내가 필요한 건 사람이었다. 그냥 매일 마주치며 인사하고 의미 없는 말에도 웃을 수 있는 사람들. 그들과 주고받는 에너지가 그리웠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이 버틴 10년이 너무 외로웠다는 걸 깨달았다. 중국어에 하루빨리 익숙해지겠다고 한국 드라마, 영화, 노래까지 모든 걸 차단했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모두 끊었다.

한국이, 가족이, 친구가 다 버거워서 한국을 떠났는데, 결국은 떠나서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목구멍까지 기어올랐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며 떠나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간다는 건 자존심 상했다. 마흔이 넘은 지금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막막했다. 중국에서 10년을 버텼는데, 결국 이루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모습으로 가족들 앞에 서는 것은 상상만 해도 치욕스러웠다. 이제 막 입주한 애지중지 꾸며 놓은 새 집을 놓고 가기도 싫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이 요동쳤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는 중국에 있어야 하는데, 나 하나 살자고 한국을 가는 게 맞는지. 중국어를 하는 나도 중국에서 살기가 힘든데, 한국어도 못하는 남편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 지. 한국에 가면 집을 얻을 돈도 없는데, 어디서 살 지.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는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가족들도 모두 반대였다.

그런데도 점점 강해지는 하나의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 가야겠다.” 이 생각뿐이었다.

중국으로 향할 때 맹목적이었던 것처럼, 한국행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당한 이유 같은 건 찾을 필요도 없이, 그냥 마음에서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안 가면 죽을 것만 같았다.

여기 남아있으면 나는 좋은 아내도, 좋은 엄마도 되지 못한 채 그냥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한국으로 가려면 나의 꿈이었던 집을 버려야 했다. 7년을 기다리고 6개월을 공사하고, 딱 넉 달 살았을 뿐이었다. 마음에서 놓아지지가 않았다. 주방에 가도 눈물이 나고, 욕실에 가도 눈물이 나고, 세탁실 바닥에 앉아 울었다. 내가 직접 디자인한 붙박이장, 무늬 맞추어 고르고 배치한 타일들, 그 모든 것이 나를 붙잡았다. 한국행을 결심하고부터 딱 두 달을 울었다. 내 마음과의 전쟁은 끝났다.

한국으로 가려면 일자리가 필요했다. 지인이 다니는 회사에 현재 근무하는 디자이너가 별로라고 하길래 내가 가겠다고 했다. 내가 가서 전체 스케줄 관리까지 두 사람 몫을 해 줄 테니 나를 고용하라고. 그 디자이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일자리가 절실했다.


겨우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산을 맞닥뜨렸다. 무슨 일이든 나의 결정에 따라주던, 그래서 당연히 같이 갈 줄 알았던 남편이 반대를 했다.

“나는 못 가. 우리 부모님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아들이랑 손자랑 다 떠나면 어떻게 해. 곧 힘도 빠지실 텐데, 내가 모셔야지”

그때부터 두 달 동안 남편과의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할 수 있을까? 부모님도 아이를 봐줄 수 없을 텐데..’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도 한국에 가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 같았다. 아이 양육 방식으로 늘 부딪쳤던 걸 떠올리며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럼 아들만 데리고 갈게. 당신은 여기 남아. 이제 그만 헤어지자.”

남편도 지지 않았다. “갈 거면 너 혼자 가. 아이는 안돼.”


아이의 양육권을 가지고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이혼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아이와 헤어지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싸움은 이성을 잃어갔다. 아이가 항상 함께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매일 싸워댔다. 남편이 동의하지 않는 이상 중국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갈 방법은 없었다. 아이는 중국 국적이었다.

몇 날 며칠을 혼자 또 싸웠다. 어떻게는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나 혼자 가서 살 수 있을까? 아이와 매일 영상 통화를 해야 하나? 얼마나 자주 중국에 와서 아이를 볼 수 있을까? 아이가 나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꼬리를 무는 생각에 희망과 좌절 사이를 수백 차례 오갔다.

아이와 떨어지는 걸 상상만 해도 견딜 수 없었지만 결국, 아이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주 보러 오면 되니까.’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끔찍하게 잘했고, 아이도 나보다 아빠를 더 따랐다. 난 아이를 포기하더라도 한국에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내 생각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나의 결정에 남편은 내 앞에 엎드려 울었다.

“같이 갈게, 우리 식구 이렇게 다 헤어질 수는 없어…”

“아니, 난 당신과 같이 갈 생각 없어. 아이보다 당신이 나한테 더 큰 짐이야.”

난 거절했다. 아이로 나를 협박한 남편이 정 떨어졌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모든 공식적인 일을 도맡아 한 억울함이 같이 쏟아졌다. '한국어 한마디 못하는 남편을 데리고 가면 그 뒤치다꺼리를 또 어찌 하나.'

아이만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계속 매달렸다. 며칠을 울면서 빌었다.

“아들 없이 나는 살 이유가 없어. 당신한테 짐 안되게 아이만 돌볼게.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아이만 크면 나는 중국으로 돌아올게. 어차피 부모님 나이 드시면 나는 돌아와야 하잖아.”


우리는 그렇게 이혼을 약속하고서야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 약속이 분노였는지, 사랑이었는지, 그때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전 07화꿈을 이룬 후의 허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