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났다는 단어가 머리에 맴돌던 그날
설날 아침, 핸드폰 화면에 뜬 한 줄의 메일.
"전 직원은 ㅇ월ㅇ일자로 퇴사처리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끝났다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중국 국적인 남편과 아이가 한국에서 살려면 동거 비자를 받아야 했다. 위장 결혼 입국 사례가 많다 보니 절차가 꽤나 까다로웠다. 보통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데, 다행히 아이가 있어서 4개월 만에 비자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비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혼자 먼저 귀국했다. 취업한 회사에서 바로 출근하기를 바랐고 나도 마음이 급했다. 10년 만에 돌아가는 한국, 내가 먼저 적응을 해야 아이와 남편을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은 10년 동안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스마트폰이 필수가 된 세상, 말은 통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대화들. 마치 외국인이 된 기분이었다.
당장 집을 얻을 돈도 없었지만, 시세도 위치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걸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일단 일산 엄마 집에 짐을 풀고 출근을 시작했다.
사실상 나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서 비집고 들어간 회사였다. 급여도 근무조건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었다. 신입급 급여를 받으면서 세 사람의 일을 했다.
그래도 난 만족했다. 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희열인지.. 고팠던 일과 사람을 채우느라 하루 12시간 근무도 즐거웠다. 단지, 일산에서 강남까지 출퇴근은 힘들었다. 20대에도 힘들었는데, 체력이 바닥이었던 그때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회사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근처에 원룸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넉 달 후에 아이와 남편의 비자가 나왔다.
중국에 가서 하루 만에 짐정리를 하고, 나머지 짐과 집은 그냥 버려둔 채 한국으로 들어왔다. 7년을 기다리고 6개월을 공사한 그 집을, 딱 넉 달 살고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으로 왔다. 가족은 함께였지만, 각자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남편과 아이를 친정집에 데려다 놓고 나는 출근했다. 주중에는 자취집에 머물고, 주말에만 보러 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위와 네 살 아이에게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살갑지 않은 말투에 아이는 할머니를 무서워했다. 남편은 낯선 세상이 두려웠고, 결국 그들은 스스로 방 안에 갇혔다.
이들을 보며 나의 근심은 더 깊어졌다.
‘나 하나 살자고, 이 둘을 감옥에 가뒀구나..’
나이 많은 엄마는 객식구 챙기느라 힘들고, 남편은 아이가 뛰면 엄마 심기가 안 좋을까 봐 아이를 단속하고, 아이는 눈치 보느라 기가 죽었다. 나 때문에 세 명이 고생하고 있었다.
당장 데리고 나와야 했다.
유일한 친구이자 베프인 M언니에게 부탁했다. 언니 소유의 원룸은 회사와 친정집 중간에 위치했고 회사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교통편이 편리했다. 몇 달 기다려야 했지만 언니는 임차인을 내보내고 나에게 무상으로 빌려 주었다.
6평 원룸에 셋이 산다는 건 힘들었지만 아들은 엄마아빠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좁지만 함께 있는 집에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다행히 근처 어린이집에 자리가 생겼다. 남편은 낮에 아이를 돌보고 밤에는 공사장 밤샘 경비 알바를 했다. M언니가 말이 안 통하는 남편에게 챙겨 준 일자리였다.
쉬는 날이면 좁은 집이 답답해서 친정집에 가곤 했다. 여러 날 쉬는 명절에는 아예 엄마 집에 머물렀다.
설 명절 전날부터 세 식구가 친정에 가서 음식 준비를 돕고 잠을 잤다. 엄마는 처음부터 방 하나를 따로 내어 주셨다. 원룸으로 가지고 가지 못한 짐들도 그 방에 남아있었다.
설날 아침 눈을 뜨고 시계를 보려 핸드폰을 집어 들었을 때, 회사에서 메일이 온 걸 발견했다.
‘연휴에 회사에서 무슨 메일이 왔지? 누가 보냈지?’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만큼 손가락은 빠르게 메일을 열었다.
“ㅇ월ㅇ일 주식회사 ㅇㅇㅇ은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였고, 전 직원은 ㅇ월ㅇ일자로 퇴사처리 되었습니다.”
손이 떨렸다.
메일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 글자가 바뀌어 있기를 바랐지만, '퇴사처리 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사장이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긴 했다. 그런데 꼭 설날 아침에 해고 메일을 보내야 했는지.
거실에서는 모여든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떡국 끓는 냄새가 났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들 속에서 혼자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나한테는 왜 이런 일만 일어나는 건지, 속이 터질 만큼 억울했다. 구석에서 숨죽여 울었고, 남편과 아이도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명절 아침의 웃음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들렸다.
채권자들의 즉각 반응을 피하고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설날 연휴를 이용한 것이었다. 사장은 핸드폰을 끈 채 집도 이사해서 찾을 수 없었다.
퇴사 통보 메일을 받았지만 연휴가 끝난 후 출근했다. 나를 이 회사로 이끌어준 지인 Y와 나만 남고 모두 떠났다.
대표가 잠적한 회사이지만 진행하던 오더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생산을 마치고 선적을 기다리는 오더, 생산 중인 오더, 생산준비를 마친 오더까지. 전량 해외 생산이기 때문에 중단하는 것도 맘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오더의 주인들이 더 큰 문제였다. 각 브랜드의 MD들이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나와 Y가 그 어떤 책임을 질 의무는 없었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단지, 우리를 믿고 오더를 준 사람들을 배신할 수가 없었다. 그들도 회사의 직원일 뿐인데, 우리 때문에 회사에서 잘리게 할 수가 없었다.
협력업체에 결제하지 못한 금액도 많았다. 하지만 피해가 생기더라도, 최소한 아무도 파산하지는 않도록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서로 양보하고 손해를 조금씩 나누어서 해결하고 싶었다.
매일 관련자들과 회의가 이어졌고, 오더를 무사히 마무리 짓기 위해 우리는 사비를 투입했다. 나는 월세라도 얻으려고 모아 오던 쌈짓돈을 내놓았다.
그렇게 1억 이상 투입했지만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때 천사같이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었다. 난 그 손을 잡기가 싫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먼저 연락이 온 건 중국 공장의 사장이었던 친인척 S였다. 내가 퇴사한 후 돈 좀 번 S는 꽤나 재력을 뽐냈다.
큰돈을 빌려 준 덕에 우리는 고비를 넘기며 4개월 만에 오더를 마무리했다.
우리가 걱정했던 거래처 담당자들은 큰 문제없이 자리를 보존했고, 망가진 건 Y와 나뿐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몰랐다.
이 선택이 앞으로 5년간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들 줄은.
그리고 S와의 악연이, 이제 막 시작될 줄은.